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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연락담당…한국정보소에 넘겨
 미-영 연락담당…한국정보 소에 넘겨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으로 옮긴 뒤 그의 후임으로 불려온 것은 유양수 중령이었다. 6·25남침 직전에 전투정보과장으로 있다가 6사단 정보참모로 전보되었던 그는 북진중에 다시 육군본부로 호출되어 장도영 국장 후임으 로 부임한 백인엽 정보국장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10월말부터 상황판에는 'CCF(Chinese Communist Forces)', 즉 중공군 정규부대의 동향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1, 7사단에서 올라온 정보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백인엽 국장은 '중공군 대부대 출현' 정보를 믿지 않으려고 했다. 장교들이 아침에 상황판을 들고 들어가서 국장에게 보고하고 나오면 'CCF'가 지워져버리는 것이었다. 유양수 과장은 '야, 다 시 기록해둬!'라고 한 뒤 국장에게 따졌다.
 
 '정보보고는 정직해야 합니다.' '증거도 없이 무슨 중공군이야'.
 
 유양수는 함흥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국군이 중공군으로부터 노획 한 물건들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육본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중공군 출 현'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6·25 직전에 전투정보과가 '남침임박' 정보 를 그렇게 올려도 믿지 않던 사태가 재연되고 있었다. 유양수 전 동자부장 관은 최근 본 시리즈를 읽고 이런 견해를 기자에게 전해왔다.
 
 '6·25남침 정보를 입수하고도 우리 군 수뇌부가 남침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은 미군의 판단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도 육본 수뇌부는 미국측의 견해를 좇고 있었습니다. 정보판단을 할 때 윗사 람의 의중을 살펴서 하면 오판이 생깁니다.'.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입장을 취하니 워커 미 8군 사령관도 그런 태도였다. 8군 산하의 미군 사단장들도 워커의 입장을 따랐다. 미군이 그러니 독자적인 정보수집, 판단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국 군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윗사람의 판단에 맞추어주는 이런 정보 왜곡이 국가적 재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즈음 워커 8군 사령관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불평을 하고 있었다. '우 리의 작전 계획이 적에게 새나가는지 적이 우리의 의도를 미리 읽고 있다 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맥아더는 도쿄와 서울에 있는 미군 사령부에 대 한 내사를 시켰으나 아무 증거도 잡아낼 수 없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을 의 심하기 시작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유엔군의 작전계획을 워싱턴의 합참에 보내면 이 복사본은 국무부, 중앙정보부(CIA), 백악관의 특정인들에게만 배포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이 고위층에 공산당 간첩망이 숨어 있다고 주 장했다.
 
 맥아더의 이 육감은 정확했다.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1등서 기관은 킴 필비였다. 그는 영국첩보기관 MI-6에서 파견나온 사람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그는 1차 세계대전 때는 처칠 해군장관의 보좌관이었다. MI-6에 들어가 출세가도를 밟았던 필비는 1949년워싱턴에 부임하여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영국첩보기관 사이의 연 락관으로 일했다. 이때 영국과 미국 첩보기관은 고급정보를 공유하고 있었 다.
 
 영국군이 한국전에 군대를 파견한 이후에는 동맹국으로서 미군의 작전 계획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6·25남침 직전 미국의 정세판단, 중공군 개입에 대한 맥아더의 판단, 만주폭격 금지 등 중공에 대한 주요 전략, 유엔군의 북진작전 등 미국측의 중요정보들이 송두리째 필비에 의해서 모스크바로 전달되고 모스크바는 이를 마오쩌둥(모택동)과 김일성에게 중계했으리라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필비의 부하이던 가이 버지스 2등서기관도 MI-6에 박힌 소련첩자였다. 영국 외무부의 미국과장이 던 돈 매클린도 소련 첩보기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미국 과장이란 요직 에 있으면서 매클린은 미국과 영국 사이를 오고가는 한국전 관련 비밀문서 를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영국과 미국 사이 정보교류의 길목을 지 키고 있었던 이 세 간첩들은 또 오랜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청년기에 빠 져든 공산주의에 충성하면서 자발적으로 소련에 봉사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맥아더가 취할 조치뿐 아니라 취 할 수없는 조치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나중 에 정체가 밝혀지자 소련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었다.
 
 1950년 11월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맥아더는 전선에 있는 모든 미 군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공급했다. 유엔군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한 달 전 의 중공군 기습에 대한 기억도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졌다(1사단장 백선엽· 증언). 맥아더는 한국전선에 있는 미군들은 이번 공세가 성공하면 크리스 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진격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벌써 전선의 분위기는 승전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이때 미군은 중대 한 실수를 범했다. 11월초에 산속으로 후퇴한 중공군들에 대한 수색을 소 홀히 한 것이다. 미군들은 차량수색을 주로 했다. 중공군들은 산속에 숨어 있었으니 그런 편한 정찰에 걸릴 리가 없었다.
 
 중공군은 유엔군들의 예상 접근로 근방 산악지대에 숨어 이들이 함정 속으로 빠져들기를 기다리고 있 었는데 미군은 수색정찰로도, 공중정찰로도 이들의 소재를 알아낼 수가 없 었다. 수색의 제1조는 '절대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지 말라'인데 미군은 중공군을 얕잡아보고는 이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것은 엄청난 인명 손실을 불러올 것이었다.
 
 11월24일 맥아더는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에 대해서 총 공격을 명령했다. 11월24일 공격 개시 첫날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1사단 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전진을 개시하여 중공군 포로를 한 명 잡았다. 신문 해보니 그는 일본인이었다. 중-일전쟁 때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중공 군 병사로서 참전한 것이었다. 공세 첫날의 진도에 만족한 백선엽 준장은 압록강까지 도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다는 자신을 가졌다.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동쪽을 맡고 있던 국군2군단을 주공면으로 선정했다.
 
 6,7, 8사 단으로 구성된 2군단은 영천 결전의 영웅 유재흥 군단장이 지휘하고 있었 는데 2군단의 정면은 묘향산맥, 오른쪽면은 산악지대로서 우군이 전혀 신 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서부의 미8군과 동부의 미10군단 사이에 방치되어 아무도 챙기지 않았던 중앙 산악지대에 매복한 중공군은 이 거대한 덫으로 국군 2군단이 빨려들면 그 측면을 내리찍으면서 배후를 포위해버릴 작정이 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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