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기습뒤 후퇴… `유적심입' 작전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박정희는 며 칠전 이동한 9사단 사령부를 찾아 강원도로 향했다. 박정희 중령은 떠나 기전 돈을 봉투에 넣어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봉투 안에는 '가용비'라는 제목 아래 쌀값 얼마, 생활비 얼마 식으로 쓴 쪽지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다. 육영수는 나중에 청와대에서 이때를 회고하면서 '가계부를 열심히 적으면서 인편으로 오 는 그분의 편지를 무척 기다렸으며, 하루빨리 평화가 와달라고 기도했답 니다'라고 말했다.
강원도 동부지방으로 이동한 9사단의 임무는 남진하는 중공군에 대비 하는 것이었다. 9사단이 맡은 방어정면은 강원도 인제-양양선으로 약 40km나 되었다. 보통 때 같으면 3개 사단이 맡아야 할 넓은 정면이었다. 박정희 참모장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거점방어를 채택한다. 9사단 작전참모 손희선의 증언--.
'처음엔 전투가 없었습니다. 사단 전방에서는 국군 1군단 소속 수도 사단과 3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북도로 진격하다가 중공군의 기습 을 받고 철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9사단은 아군지역 후방에 방어선을 친것이죠. 전방의 아군이 해상을 통해 철수하여 38선 이남의 동해안에 상륙함으로써 사단 전방이 진공상태가 되었습니다. 패주하던 인민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우리를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38선을 맨 처음에 돌파, 북진의 선두에 섰던 1군단이 남쪽으로 철수 하여 이번엔 그 38선의 동부전선을 중공군의 남진으로부터 지켜내는 임 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전의 국면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9사 단도 1군단에 배속되었다. 12월20일 강릉에서 9, 수도, 3사단의 참모장 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9사단은 오른쪽 전선을 수도사단, 왼쪽을 3사단에 인계하고 앞(북쪽)으로는 설악산, 뒤(남쪽)로는 오대산을 둔 험 준한 산악지대를 방어하기로 했다. 박정희 참모장은 눈보라치는 전선을 덮칠 폭풍을 기다리면서 불안한 세모를 보내게 되었다.
1950년 11월 초순과 중순에 걸쳐서 맥아더는 중공군의 전력에 대한 결정적(또는 고의적) 오판을 한다. 이 오판은 한국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10월말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 기습으로 한미군이 큰 타격 을 입었음에도 맥아더는 공식적으로는 '중공군 정규병력의 대거 참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습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난 11월5일 맥아더는 마침내 '인류역사상 가장 침략적인 행동을 감행한 중공에 대해서 세계가 봉쇄작전을 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중공군 참전 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날 중공군은 전 전선에서 갑자기 공격을 중단하 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북쪽 산중으로 물러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 발해버린 것이다. 중공군의 이런 후퇴는 맥아더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중공군을 과소평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격을 중지하고 후퇴해버린 중공군을 두고 맥아더 사령부는 '역시 별것 아니구나'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모택동은 이 즈음 거대한 덫을 놓고 있 었다.
유적심입작전, 즉 적을 깊게 끌어 들인 다음 우회, 포위작전과 정면 돌파를 배합한 입체적 섬멸전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 퇴를 가장한 매복이 필요했다.
11월6일, 맥아더는 90대의 B-29폭격기 편대를 띄워 압록강에 걸린 철 교들을 폭격, 만주로부터 중공군이 북한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려 고 했다. 맥아더는 극동공군의 스트레이트미어 사령관에게 출격명령을 내린 뒤 잠자리에 들었는데 폭격기 편대가 이륙하기 직전 워싱턴의 합참 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별도의 통보가 있을 때까지 한만국경으로부터 5마일 이내의 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화가 났다.
'이 폭격이 연기되는 시간만큼 미군과 유엔군 장병들의 피가 더 많이 흐르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주기 바란다.이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검토가 없다면 본인은 이로 인한 파국의 책임을 질 수 없다.'.
브레들리 합참의장은 맥아더의 위협적인 전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읽어주었다. 트루먼은 폭격을 승인해주도록 지시했다. 합참은 여기에 희 한한 조건을 붙였다. '압록강 철교중 북한측 반만 폭격하라. 그리고 압 록강에 있는 댐과 발전소를 폭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폭격기가 만주영공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철교를 적중시킬 수 없을 뿐 만아니라 만주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미군 폭격기를 공격하는 적 전투 기(소련군 조종사들이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미그 전투기를 몰고 있었다) 를 국제법상의 '추적권'에 의하여 만주 상공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3분 간만이라도) 아군기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워싱턴에서 는 유엔참전국들이 만주영공 침범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맥아더의 항의를 묵살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에 인원과 물자를 대주는 만주기지를 성역 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흥분했다.
11월9일 워싱턴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는 한국전에 관한 기본전략을 토의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마샬 국방장관, 브레들리 합참의장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도 북한에 들어온 중 공군의 규모를 실제병력의 6분의 1정도인 6만∼7만명 정도로 잡고서 개 입목적을 '압록강의 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설정'이라고 해석 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도 맥아더 사령부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중공군을 과소 평가하고 있었다. 마샬 장관은 동부전선으로 진격한 유엔 군이 너무 넓은지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점을 지적했고 애치슨 장관은 '현전선보다 방어에 더 적합한 진지선이 어디인가'라고 따졌다. 브레들 리의장은 '군사적 견지에선 후방으로 물러나는 것이 유리하나 그렇게 하 면 한국인의 사기와 국제여론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고 했다.
영국의 대전략가 윈스턴 처칠도 맥아더가 한반도의 목(평양∼원산선)부분에서 진격을 정지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희망했으나 맥아더는 '아시아 사 람들은 공격적인 지도력을 숭배한다'면서 이를 묵살했다. 평양∼원산선 은 약2백km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좁은 병목이다. 그만큼 병력을 집중하 여 방어할 수 있는 데 반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전선이 네 배나 넓어져 병력이 분산됨으로써 적에 반격의 기회를 줄 우려가 있었다.(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