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이끌며 남진…박의 9사단 돌파
맥아더 원수는 1950년 12월 3일 당초 계획했던 평양-원산 저지선을 포 기하고 서부, 동부 전선의 모든 유엔군 부대는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양 방어의 거점 도시인 성천은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었는데 이곳이 이날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중공군은 성천 에서 평양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유엔군을 배후에서 포위할 생각을 가진 것같았다. 유엔군을 추격하는 중공군의 산악행군 속도는 하도 빨라서 제 공권하에서 대로를 따라 차량으로 후퇴하는 미군들을 추월할 정도였다.맥 아더는 평양-원산 사이애 있는 산악지대를 유엔군이 방어할 수가 없기 때 문에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면서 38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미합참에 보고했다. 그는 '중공은 이미 26개 사단을 전선에 투입하였고 20만 명은 만주에서 대기중이다. 이것은 우리의 소수 병력이 전중공인민 과 대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적 결단으로새로운 작전이 수 립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 하고 있었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의 북진작전에제동이 걸릴까 봐 '개입 가능성 없다'고 보고해온 맥아더는 이제는 말을 바꾸어 '중공군 이 개입했으니 이길 가망이 사라졌다. 이기고 싶으면 중국을때려야 한다' 는 확전의 논리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선 에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 의한 38선으로의 철수 결정은 한반도 통일을 포기한 것일 뿐 아니라 수복한 북한주민들을 다시 적 치하로 넘겨주는 것 을 의미했다. 국군이나 남한 정부나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으로 내려오도록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수백만의 북한사람들은 자유를 향한, 목숨을 건 집 단 거주 이전을 감행한다. 평양철수, 흥남철수, 1·4후퇴로 해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산가족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 이때이고 한국인들이 자유의 사로 김일성 정권에게 '당신은 아니오'라고 선고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 성을 남한쪽으로 굳힌 것이 이때였다.
평양은 12월 5일에 포기되었다. 평양이 고향이고 북진 때는 평양 돌입 의 선봉장이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대동강 철교를 비롯한 평양의 중요시 설들이 모조리 폭파되고 대동강역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탱크 18대 가 대포 한 발 못쏘아보고 화염에 휩싸여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생전에 내가 보는 평양의 마지막 모습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끊어진 대 동강 다리 아래로 흐르는 차가운 강물로 뛰어든 피란민 수백명이 죽어가 고 있었다. 백선엽은 황해도의 사리원을 지날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 '미 군이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이 한국전을 거치면서 관찰한 국군의 문제 는 '상황이 유리할 때는 초인적인 용감성을 보이는데 불리하게 돌아가면 삽시간에 무너져버리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휘 관의 솔선수범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평소의 훈련과 계획이 철저하여 부대 가 기습을 받아 당황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휘 관론이다. 서부전선에 투입된 국군사단 가운데 질서 있는 후퇴를 한 것은 1사단뿐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문제가 많은 한국인들을 지휘하려면 지휘 관의 속이 썩어야 한다'고 회고했다. 12월 15일 1사단은 6월 25일 아침에 있었던 바로 그 자리, 고랑포로 돌아왔다. 38선을 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수비를 해야할 입장으로 원위치한 셈이었다.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1군단(수도사단과 3사단)과 부전고원을 넘 어 장진호로 북동진하던 미10군단(제1해병사단, 미3사단, 미7사단이 주력) 은 11월말 중공군 9개 사단(7-8만)의 매복 기습에 말려들었다. 한미군 약 10만 명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고원과 협곡을 빠져나와 흥남으로 후 퇴했다. 이 포위망 탈출작전은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지 막 철수선이 흥남부두를 떠나고 부두시설과 보급창고들이 폭파되는 것으 로 막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철수 작전이었다. 함선 1백9척이 동원되어 군인 10만5천명, 차량 1만7천5백대, 물자 35만t, 한국 민간인 9만8천명을 남쪽으로 실어날랐다.
이 후퇴-철수작전에서 한미군은 약 1만5백명의 병력손실(전사, 실종, 부상)을 당했다. 7만명의 중공군이 병력과 화력에서 월등한 유엔군을 패퇴시켰다는 것은 중공군이 결코 인해 전술만으로 이기는 군대가 아님을 입증한다. 맥아더는 흥남에서 철수한 10군단을 38선 방어에 재배치했다. 12월 하순 13개 사단, 3개 여단으로 구성된 20여만명의 유엔군은 남하하는 29개 사단 31만명의 중공군을 기다 리고 있었다.
신혼의 박정희 중령이 참모장으로 있던 9사단은 앞으로는 설악산,뒤로 는 오대산을 둔 산악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인민군 2군단과 길원팔유격 부대가 주적이었다. 이 유격부대는 인천상륙작전 뒤 낙오되었던 인민군 패잔병을 수습하여 만든 부대였다. 12월 26일 인민군 2군단은 뒤에서 남 진하는 중공군을 선도하듯이 9사단과 수도사단이 지키고 있던 동부전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인민군 2군단 중 10사단은 약 1만명의 병력을 가진 완편사단이었다.
인제에 있던 이 10사단은 9사단의 좌측방 방어선을 돌파하여 단숨에 원주 북쪽 50km 지점까지 진출했다.9사 단은 아직 방어선을 정비하기 전이었고 거점 방어를 하고 있었으므로 큰 전투 없이 10사단을 통과시켜주고 말았다. 9사단은 배후에서 10사단 병력 이 출몰하자 영월 방면으로 후퇴를 시작한다. 인민군 10사단은 그러나 박 정희의 9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남하하기 시작했다.
10사단은 그 뒤 태백산맥을 타고 횡성, 원주, 제천, 영주, 안동, 의성, 포항, 대구쪽으로 내려가면서 유엔군의 후방보급선을 차단하고 교란한다. 미군이 나중에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란 별명을 붙여준 10사단은 4개월간 약 1천km의 작전거리를 기록하면서 강원도, 충북, 경북 내륙을 휘젖고 다 녔다.
전선의 중공군 대공세를 막기도 힘에 부치고 있던 미군은 흥남에서 철수시켰던 최정예부대인 제1해병사단(병력이 약 2만6천명이고 군단 규모 의 화력을 보유)을 비롯한 약 5만의 병력을 10사단 토벌에 돌려야 했다. 10사단은 이 산중 게릴라 작전중 병력의 약 90%를 잃었지만 지휘부는 약 1천명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귀환하여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