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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출 직후 9사단 궤멸당해
 박 전출 직후 9사단 궤멸당해
 
 대구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내정된 박정희 참모장을 보내는 부하 들의 환송연이 끝난 뒤 정훈부장 이용상 대위가 말했다.
 
 '참모장님, 정보학교 교장으로 가신다니 간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 다' 이렇게 말문을 연 이용상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의 인연을 설명 했다.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이용상은 일본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서 근무하다가 탈출, 중국군 193사단에서 근무했다.
 
 일본이 항복 한뒤 일본군 82여단을 무장해제시킬 때 일본군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김영주를 발견하여 중국군으로 옮겨주었다. 아홉달 동안 중국군(장개석 군대)부대에 함께 있으면서 정이 들었던 두 사람은 1946년 5월 함께 서 울로 돌아왔다. 김영주는 이용상의 집에서 일주일간 머물다가 평양으로 떠났는데 헤어질 때 하던 말이 오래 남았다.
 
 '내래 일본군에서 통역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형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겁네다. 용서가 아니라 맞아죽을 겁니다'.
 
 이런 사정을 박정희에게 설명한 뒤 이용상 대위는 '정보학교에 가시 면 혹시 김영주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도 좀 알려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이야기 를 다 듣고 있던 박정희 대령은 입을 뗐다.
 
 '여보, 이대위, 그 친구가 일본 통역을 했기로서니 흠될 게 뭐요. 그 런 동생을 김일성이가 때려죽인다니 말이나 되요? 나는 김영주가 조국을 배반했다고는 보지 않소. 그 친구가 일본군 통역을 한 데는 아까 이 대 위가 말한대로 딱한 사정이 있지 않았소. 내가 만군에 간 것도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때문이오. 아무튼 잘 알았으니 그 친구 소식이 있는대로 알리지요. 걱정마시오'.
 
 박정희 대령은 대구로 가는 길에 후방에 있던 김재춘 병참참모의 부 대를 찾아갔다. 김재춘은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보신을 시켜주고 하룻 밤을 같이 보냈다. 박정희가 대구 삼덕동의 셋집에 도착한 것은 1951년 5월10일. 쇠약해진 박정희는 보름간 집에서 정양했다.
 
 육영수는 인삼을 다려 남편을 먹였다. 박정희의 이 귀가는 위기일발의 탈출로 밝혀진다. 5월 16일 저녁 동부전선에 집중된 중공군의 대공세로 박정희가 키워온 9 사단은 궤멸되고 수많은 전사, 부상, 실종자가 발생했다. 체력이떨어진 박정희가 전선에 있었더라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후퇴과정에서 희생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재춘은 말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산파역을 맡았던 9사단의 붕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 '현리참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곤했다.고 개 하나 때문에 2개사단이 붕괴된 이 현리 대패는 6·25전사를 통틀어 가장 쟁점이 많고 교훈도 많은 전투로 기록되었다.
 
 1951년 5월16일 저녁 중공군은 동부전선에서 또 다시 대공세를 펴면 서 인제, 현리,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3군단(3,9사 단)과 10군단 예하 국군 5, 7사단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이 4개 사단이 아무래도 미군보다 취약했기 때문이다. 16일 밤10시쯤 9사단의 이용문 부사단장이 유재흥 3군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왼쪽에 인접한)7사단이 밀리고 있어 오마치고개가 차단될 것 같습 니다. 사단의 중장비를 미리 빼겠습니다' 유 군단장은 '야포는 빼지말고 계속 사격지원을 하라'고 명령했다. 낙동강 방어전때 '영천 회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유재흥 장군은 이때 오마치 고개에 병력을 투입하여 확 보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현리 대패는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지 못 한 때문에 일어났다. 그때 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된 3군단의 2개 사단, 즉 3, 9사단에 대한 유일한 보급로가 이 오마치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이고개를 적이 차단하면 2만 병력이 전방에서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재흥 군단장은 9사단 29연대의 1개 예비대대를 이 고개에 배치했 다. 그런데 미군측은 앞서 전투지경선을 조정하면서 이 오마치 고개를 3군단이 아닌 10군단의 7사단 관할로 변경시켜 버렸다. 유 군단장이 항 의해도 앨몬드 10군단장은 막무가내였다. 앨몬드 군단장은 한 술 더 떠 오마치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재흥은 '무슨 소린가. 우리 군단의 생명선을 우리가 지키는데'하고 버텼다.
 
 앨몬드는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 와 있는 것은 참 을 수 없다면서 상급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 렇게 무인지경이 된 이 요충지를 중공군이 기습 장악해버린 것이다. 중 국측 공간사에 따르면 '항미원조지원군 20군60사단은 신속하게 적의 종 심을 향해서 진격하여 17일 새벽3시에 오마치 일대를 점령, 국군 3, 9사 단의 철수로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지도상으로는 23km이지만 실제 거리는 30km를 넘는 험준한 산중을 8시간만에 신속한 야간행군으로 돌파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것이다. 이 경이적 행군속도가 유재흥 군단장의 계산을 흔들어버렸다.
 
 유 장군은 지형과 거리를 감안하여 적이 오마치에 도착할 시간을 17 일 오후로 보고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밀어닥치는 중공군을 받아내기도 힘든데 유일한 철수로까지 차단되어 사실상 포위되어 버린 3, 9사단은 혼란상태에 들어갔다.
 
 유 군단장은 17일 오후 경비행기를 타고 현리에 내려 3사단장 김종오, 9사단장 최석을 불렀다. 군단장은 '9사단 장은 병력을 수습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 철수로를 확보하고 3사단장 은 현리 전방을 지켜 9사단의 후방공격을 엄호하라'고 명령한 뒤 군단사 령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내가 현리에 남아 오마 치탈환작전을 직접 지휘했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이날 오후 5시 유군 단장은 양사단장이 요청한 보급품을 현리에 공중투하했다. 이날 밤늦게 육본에서 군단장에게 '3군단을 창촌-오대산선으로 후퇴시켜라'는 명령 이 떨어졌다. 3, 9사단사령부에 연락을 취하니 통신이 되질 않았다. 군 단사령부의 전참모들을 전방으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18일 아침, '아군은 오마치 공격을 해보지도 않고 분산, 지금 방대산 쪽으로 빠져나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재흥은 아연실색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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