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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랑- 전선의 봄
 72세의 노장 맥아더는 외교관들과 정치인들이 한국전을 38도선상에 서의 무승부로 끝내려는 데 정면도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전의 거의 모든 전쟁은 승리 아니면 패배로 결말이 지어졌다. 그런데 트루 먼 행정부는 한국에서 현지사령관의 손발을 묶어놓고는 승리도 패배도 아닌 어중간한 그 무엇을 성취하려고 했다. '제한전'이란 개념은 선명 한 승부밖에 모르는 군인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정치인들의 말장난이요 음모였다.
 
 맥아더는 대외적인 발표를 할 때는 합참의 허가를 받으라는 트루먼 측의 지시를 무시하고 기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 다. 1951년4월5일 미하원에서 공화당 조 마틴 의원이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마틴은 그 전에도 '우리가 한국에서 승 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면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 젊은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야 마땅하다'고 공격한 적이 있는 우파였다.맥 아더는 마틴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을 썼는데 마틴은 그 내용을 공개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유럽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외교관들은 말로써만 싸우고 있다. 아시아에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진다면 유럽의 멸망은 불가피하다. 귀하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여기서 승리해 야 한다. 전장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격분한 트루먼 대통령은 5일 뒤 맥아더 원수를 극동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미군의 원수에게는 전역이란 개념이 없다. 죽을 때까지 현역 대우를 받는다). 맥아더의 후임은 릿지웨이 미8군사령관, 릿지웨이의 후임에는 밴 플리트 중장이 임명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해 임 뉴스를 듣고나서 '트루먼 그 사람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갔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이 무렵 그의 홍보고문이던 로버트 T 올리버한테 보 낸 편지는 맥아더 해임은 영국과 미국무부의 음모라는 시각을 담고 있 다.
 
 트루먼은 이때 중공은 소련의 앞잡이라는 도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소련의 하수인으로 한 짓이며 미국이 만 주를 치고 중국 본토를 봉쇄하면 소련이 반드시 서유럽을 공격할 것이 고, 미소 정면대결이 벌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정 면 대결에 대비한 군사력 증강이 되어 있지 않은 미국으로서는 2개 전 선에서의 출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사이 모스크바에서 공 개된 구소련의 기밀문서에 의해서 트루먼의 이 생각은 오판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때 스탈린은 미국과의 정면대결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 고 있었다. 미군이 만주를 폭격하더라도 소련은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 고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북한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는 것이다.
 
 소련과 중공의 관계에 대해서 냉정한 관찰을 하고 있었던 것은 영 국이었다. 노동당 수상 애틀리는 중공군의 개입 직후 트루먼과 정상회 담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충고했다.
 
 '소련과 중공은 극동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우 리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소련이 우리의 유일한 친구이다'는 생각을 갖지않도록하여야 한다. 우리가 중공을 소련의 졸개로 취급한다면 우 리는 무의식중에 소련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중공은 티토화(기자 주: 유고슬라비아의티토처럼 소련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 는 것)될 요인을 갖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영국은 중국에 대한 직접 공격은 중공을 소련 편으 로 밀어버리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12년 뒤 트루먼 은 은퇴한 뒤 살고 있던 자신의 집을 찾아온 김종필에게 이렇게 말했 다고 한다.
 
 '나는 통일을 못시켜드린 점으로 해서 한국사람들에게는 참 미안하 게 생각합니다. 영국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1951년3월23일자로 9사단은 3군단의 예비대로 돌아 휴식, 교육, 훈 련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사단사령부는 강릉시의 남쪽 6km 명 주군 구산리에 두었다. 박정희 참모장의 지휘로 사단은 군장검사를 실 시하여 망실품을 교체하고 소대, 중대 훈련을 시행했다. 4월15일 박정 희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며칠 뒤 박정희는 연락병을 보내 대구의 육 영수를 군용 앰뷸런스에 태워 데리고 왔다. 육영수는 남편의 어깨에 무궁화 세개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어머, 참모장님 계급장이 달라졌 나보네요'라고 했다. 그리고는 남편을 향해서 '어깨가 꽉 찬 것 같아 보기가 좋네요'라고 하니 박정희는 씩 웃기만 했다. 강릉에서 두 사람 은 뒤늦은 신혼여행을 즐겼다. 육영수도 군복을 입고 박정희를 따라 경포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꿈같은 전선의 신혼생활을 일주일간 보내 고 돌아간 아내에게 박정희는 사진과 편지, 그리고 자작시를 보내주었 다.육영수는 식구들에게 사진을 자랑하고 다녔다. 육영수의 언니 육인 순은 '어머나 참 아름다웠겠구나. 두 사람이 전쟁통에서 참 오붓한 시 간을 가졌겠구나'라고 말했다. 조카 홍소자(한승수 전 대통령비서실장 의 부인)는 이모가 보여주는 사진을 대하자 '군인과의 사랑이라 해봐 야 삭막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사진이 다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정말 말이 필 요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박정희가 붉은 선이 그려진 괘지에 써보낸 시의 제목은 '춘삼월 소 묘'였다.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훌너훌 / 거울 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 /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 복숭아꽃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 거기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 춘삼월 긴긴날에 때 가는줄 모르도다 /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 저 건너 봄 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 우리도 노를 저어 누벼 볼거나>.
 
 육영수는 이 시의 '나와 영'이란 글귀의 '영'자에 연필로 동그라미 를 그려놓고 '나, 영수'라고 적어두었다. 말미에 '1951년4월25일'이라 적혀있는 이 시를 육영수는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읽어보곤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구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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