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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제거계획 : 51년말 발령
 51년말 발령… 이용문과 세번째 인연
 
 1951년 5월25일 유엔군이 현리대패를 극복하고 동부전선에서 중공군 에 대한 반격작전을 마무리짓고 있을 때 박정희 대령은 육군 정보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9사단 부사단장 시절 박정희 참모장과 친했던 김종 평 정보국장이 추천한 자리였다. 정보학교는 대구 칠성국민학교 교사를 빌려쓰고 있었다. 정보요원들의 교육을 맡은 학교라 박정희는 모처럼 안정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구 삼덕동 셋집에는 이즈음 한 손님이 들었다. 그는 뒤에 민간인으로서 5·16 주체세력이 되고 공화당 원 내총무를 역임했던 김용태였다. 이 무렵 박정희의 조카 박영옥과 결혼 한 김종필과는 서울사대 동창사이인 김용태는 김종필 대위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났다.
 
 김용태는 미8군 연락장교단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내외는 건 넌방에서 공짜로 기거하도록 해주었다. 김용태가 사양하니까 육영수가 말했다.
 
 '전쟁 때는 어딜 가도 고생일 테니 우리 집에서 고생하세요. 먹고 자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우시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쌀이나 열 가마 쯤 가져오세요.'.
 
 박정희의 귀가시간은 늦은 편이었다. 박정희는 가끔 김용태를 불러 서 소금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깡술을 마시다가 보면 빨리 취하는 법.
 
 박정희는 독백처럼 쏟아놓는 것이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동족상잔의 전쟁을 무모하게 끌고간 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야. 전쟁을 막으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으려면 빈곤을 없애는 길밖에는 없어. 빈곤퇴치, 이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야!'.
 
 박정희의 가슴에 쌓여가던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를 엿보게 하는 시도 쓰곤 했다. 이해 10월에 쓴 한 편.
 
 '하늘도 자고 땅도 자고 / 사람도 자는 고요한 밤 / 벌레소리 처량 히 들려오는 / 어두운 가을밤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만 / 어둠 속에 흡 수되어버리고 / 캄캄한 어둠 속에 한없이 헤매고 찾아도….'.
 
 박정희는 이즈음 9사단 참모장 시절 정훈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이 용상 시인이 시집을 내려고 하는데 돈을 못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렀다. 박정희는 이 대위가 방으로 들어오자 장롱에서 신문지 뭉치를 하나 꺼내 아무렇게나 던져주었다. 이용상이 놀라서 '이게 뭐지요'라고 물었다.
 
 '시집 출판비에 보태쓰시오.' '이 뭉치가 다 돈입니까? 이 돈 다 어디서 났습니까?' '세상이 다 도적놈들인데 난들 도적질 말라는 법 있소?'.
 
 옆에서 육영수가 거들었다.
 
 '이 대위님 염려하실 돈이 아닙니다. 저 분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어서 갖다가 좋은 시집 내세요.'.
 
 이렇게 하여 출판된 시집이 '아름다운 생명'이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1년 반 전에 헤어진 이현란과 스친다. 이현란은 그 때 재혼하여 대구에서 살고 있었다. 이씨의 생전 증언.
 
 '내가 모양 내고 원피스 입고 싹 빼고 가는데 지프의 빵빵 대는 소리 가 들려요. 돌아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고 생각했 었는데 박씨가 내리려고 해서 나 살려라 하고 막 뛰었지요. 마침 트럭이 지나가서 만나지 못했어요.'.
 
 11월29일 박정희는 아내의 생일 선물로 스웨터를 사주었다. 12월10일 박정희 대령은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으로 전보되었 다. 그해 6월부터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아래서 작전국장으로 있던 이용 문 준장이 끌어준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세번째의 만남이었다. 그때 육군참모차장은 유재흥으로 육본은 총창, 차장, 작전국장이 모두 일본육 사 출신들이었다. 전임 정일권 총참모장-강문봉 작전국장이 만주군관 출 신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박정희는 만군 출신으로 분류되지만 만주군 관학교 예비과정을 수석졸업, 일본육사에 유학하여 3등으로 졸업함으로 써(57기)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일본육사 출신들도 한 수접고 대했다.
 
 시인 구상은 그때 국방부 기관지인 진중신문 '승리일보'의 편집책임 자였다. 친구인 이용문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 준장은 그를 참모회의에 참석시키기도 했다. 어느날 이용문의 사무실로 구상이 놀러 갔더니 조그 맣고 새까만 장교 한 사람이 와 있었다. 이용문이 그 사람을 소개시켜주 면서 일본말로 '이 사람은 의리 남아야'라고 했다. 그 사람-박정희 대령 의 눈이 퍽 인상적이었다. 맹수의 그것처럼 매서웠는데 눈동자가 한가운 데 있질 않아 잘못 보면 사팔뜨기 같았다. 이, 구, 박 세 사람은 곧 술 친구가 되었다. 주석의 분위기는 이용문과 구상이 주도했다. 박정희는 상관인 이용문을 의식하여 활달하게 놀지 않았다.
 
 구상은 박정희의 견식이 높은 데 놀랐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사 람인 것 같았다. 역사서를 많이 읽고 있었는데 월남흥망사에 대해서 이 야기할 때는 상당히 깊은 이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전국 교 육과장 최영성(유군준장 예편·현충사 관리소장 역임) 중령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말 없는 사나이'였다. 공문을 기안하여 결재를 받으러 가면 설명을 듣지 않고 미결, 기결, 보류라고 적힌 서류함에 두고 가라고 했 다. 며칠 뒤 서류를 과장에게 돌려줄 때 보면 오자, 탈자까지 교정을 보 고 자신의 소견을 메모한 부전지를 첨부시켜 두곤 했다. 좀처럼 한 번에 결재를 해주는 법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박정희는 부하들을 통제했다.
 
 이용문 국장은 일선시찰을 명목으로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잦아 안살 림은 박정희의 몫이었다. 차장이 아니라 국장의 대리자였다. 박정희의 전임자는 정래혁(국방장관 국회의장 역임) 대령이었다. 정 대령은 이용문과 함께 일선시찰을 자주 했다.
 
 '이용문 장군은 팔랑개비 같은 경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쿨쿨 자요.우 리는 불안해서 오금을 못 펼 지경인데. 그분은 대담하면서도 천진난만했 어요. 낙동강 하구 상공을 지날 때인데 오리떼가 보이니까 고도를 낮추어 오리떼 속으로 들어가게 했어요. 놀란 새들이 솟구쳐 오르니까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어요.'.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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