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에 포위됐다' 2개사 뿔뿔이…
3, 9사단은 왜 붕괴했는가. 17일 새벽에 양사단의 유일한 퇴로가 지 나는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우회 점령되자 2개 사단 약 2만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이 전방 방어선을 포기, 현리-용포 부근으로 집결했다. 밀려든 병력과 차량으로 폭 5m도 안 되는 좁은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빚 을 정도가 되었다. 이날 오후 최석 9사단장은 30연대로 하여금 오마치 고개를 점령, 활로를 뚫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30연대(연대장 손희선 대 령)는 그 일주일 전에 중공군으로부터 매봉산, 한석산을 탈환한 전투력 이 강한 부대였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는 '17일 밤 적이 사격하는 포탄이 용포-현리 간의 도로에 낙하하기 시작하자 혼란이 일어나 어떤 영문인지 30연대의 1대대,2대대는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지 않고 방대산으로 철수했다. 다리 골과 구만동선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3대대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도 상부의 지시가 없어 연대본부에 사람을 보냈더니 철수하고 없었다'고 적 고있다. 3대대 예하 10중대원들은 철수통보를 받지 못한 채 개인호를 파 고서 모두 잠들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30연대장 손희선(육본 인사참모부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 역 임)은 이 기록을 반박한다.
'저는 오마치 돌파 명령을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 마치 고개 북쪽 고지에 배치되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최석 사단장이 과연 30연대장에게 오마치 고개 돌파명령을 확실하게 내렸는 지는 애매하다. 그는 생전 증언에서 유재흥 군단장으로부터 돌파 명령을 받았는지도 확실치 않다고 했을 정도이다. 9사단 30연대를 엄호 하여오마치를 돌파하기로 되어 있었던 3사단 18연대(연대장 유양수)는 30 연대의 공격을 기다렸으나 공격개시 시간(밤9시)이 지나도록소식이 없자 수색중대를 30연대쪽으로 보냈다.
30연대를 포함한 9사단이 방대산쪽으 로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최석 사단장을 수행하고 있었던 김재춘 군수참모는 '주변에서 소총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은 지휘를 포 기하고 방대산으로 올라갔다. 그때 최석 준장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독전해야 할 사단장이 무질서한 후퇴를 선도한 셈이다. 9사단 28연대 부연대장이던 염정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후퇴로가 막혀버려 아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리-용포리에 모여 있던 장병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확 산되었습니다. 밤이 오고 오마치 돌파에 실패하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공 황 상태가 빚어졌어요. 아직은 중공군이 현리쪽으로 집중사격을 하고 있 지 않았는데도 장병들은 뿔뿔이 방대산으로 기어올라 철수하기 시작했습 니다. 지휘체제가 무너져버린 것은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 문이었습니다. 지금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영천회전의 영웅'이자 '현리 패장'이란 명암을 가진 유재흥 당시 3 군단장은 17일 오후 현리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전명령을 내린 뒤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다. 포위망 속의 장병들은 이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야,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군중심리 도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2개 사 단은 싸워보지도 않고 방대산(해발1천4백36m)을 타고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지휘체제는 마비되었으며 조직도 와해되어 버렸다. 군대가 군중으로 변해버렸다. 상황이 유리할 때는 초인,불리해지 면 오합지졸이 되어버리는 국군(특히 장교단)의 특성은 주변의 힘(권력) 의 관계에 너무나 민감한 기회주의적 민족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군인(특히 장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명예가 내면화되어 있지 않고 강제적 규 율에 의해서만 봉합되어 있는 군대는 위기를 맞으면 눈녹듯 해체되고 마 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책임은 도망에 앞장선 지휘관들의 무능이었다. 최석 사단장의 부임 이후 벌어진 박정희 참모장과 사단장 사이의 갈등,참 모들과 사단장 사이의 불화 등은 이런 위기 때 지휘부의 단합을 저해했을 것이다.
군대가 붕괴해버리면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체력만 믿고 제 살길을 찾아간다. 명령계통도 통신도 마비된다. 장교들은 붙잡힐 때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버린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병에게 허 기진 장교가 좀 달라고 해도 거절당한다. 군악병은 나팔이 무겁다고 버리 고 갔다.
심지어 시계도 무겁게 느껴져 풀어던져버렸다. 중화기도 버렸다. 높이 1천m가 넘는 산과 계곡,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사흘간 달아나는 과 정에서 중공군의 매복, 요격, 추적을 받은 양사단 약 2만명 중 6천명이상 이 전사, 아사, 부상, 실종되었다. 9사단 병참참모 김재춘 중령은 '몸이 크게 쇠약해져 있던 박정희 참모장이 부대에 남아 있었더라면 후퇴과정에 서 탈진하여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때 박정희 참모장 숙소에서는 젖먹이가 딸린 아주머니가 가정부처 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저와 함께 후퇴하는데 깊은 계곡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적의 총격이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건너는데 그 아주머니가 제 앞에서 가고 있었습니다. 등에는 빈 포대기만 있어요. '아 주머니, 아이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떠내려간 아기를 찾 는다고 야단합디다만 이미 늦었지요.'.
'돌아온 사자' 조창호 소위는 9사단30연대1대대에 배속된포병 관측장 교였다. 한석산에 있다가 철수명령을 받고 유선 가설병과 함께 전화선을 거두면서 포대 본부로 돌아오니 모두 철수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 뒤 3일 간 산중을 헤매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행길에 국군과 미군들을 더러 만 났으나 뭉쳐서 걸으면 들키기 쉽다고 해서 개인행동을 했다. 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민가에 들어갔다가 그 집에 와 있던 중공군에게 붙잡혔다. 5 월 18일, 미군은 국군이 현리에 버리고 간 수백대의 차량과대포들을 폭격 하여 불태워버렸다.
9사단이 철수 48시간 뒤 직선거리 약50㎞ 후방 속사 리에서 재집결했을 때 병력은 약1천3백명에 불과했다. 9사단의 최종적인 피해는 총병력의 약35%, 총화기의 약80%였다. 중공군은 5일간의 공격으 로 인제에서 하진부리까지 약1백㎞를 돌파했으나 보급선이길어지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5월23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 실지를 회복했다. 화가 난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국군3군단을 해체하여 9사단을 미3사단에, 3사단을 국군1군단에 배속시켰다.
<'제 5부-끝'. 내일부터 '제6부 쿠테타 연습-이승만제거 계획'이 계속 됩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