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이 실각 노리고 `계엄 해제'요구
5월28일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는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이승 만 대통령이 잡아간 국회의원들의 석방, 의원 및 가족들의 안전을 보 장하라는 최후통첩을 대통령에게 제시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유엔군이 국회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였다.
이 건의를 접수한 국무부 북동아시아 과장 케네스 T.영은 다음날 '사 태가 악화되면 유엔군이 부산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조치'를 포함한 4단계 행동안을 기초하여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앨리슨에게 보고했다. 30일 국무부는 부산의 미 대사관으로 전문을 보낸다. '만약 유엔군이 부산에서 경찰권을 행사하든지 계엄령을 펼 경우 한국군이 어떤 태도 를 보일지 궁금하니 알아보라'는 요지의 지시였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는 안까지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군보다 미국대사관과 국무부가 이승만에 더 강경했다. 미국대사 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실각시키려 했고 미군은 이승만이 유엔군의 전 쟁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5 월30일 오후 라이트너는 대통령을 찾아가 계엄령의 즉각적인 해제를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미국정부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서한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귀하는 귀국정부에 계엄령이 곧 해제될 것이라고 보고하시오.' ''곧'이라면 이틀 뒵니까 2주 뒵니까.' '곧 해제할 거요. 2분 뒤가 될 수도 있고 두 달 뒤가 될 수도 있소.'.
미국정부의 계엄령 해제요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치적 자살'을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계엄령이 해제되면 자유를 되찾은 국회 는 간선을 통해서 장면을 차기대통령으로 뽑을 것이라고 대사관에선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 계산에 넘어갈 이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장면을 대통령으로 미는 이유를 한국의 국익을 희생시켜 휴전 협상을 적당히 마무리짓는 데 '유순한' 장면이 협력할 것으로 판단하 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미국과 맞서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결정적 시기에 이승만을 가까이서 관찰했던 그의 미국인 고문로버트 T. 올리버는 '건국의 내막'(박일영 번역)이란 저서에서 이런 요지로 기록했다.
<대통령은 '나를 이해하려면 나는 외부환경이 아니라 신념의 지배 를 받는 인간이란 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외 부의 압력이 강하게 밀려올 때는 가위를 갖고 정원에 나가 나뭇가지를 정리해주든지 작은 배를 타고 낚시를 나갔다. 나를 데리고 갈 때는 대 화는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였다. 그는 '민 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지도자가 항상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민주국가에서는 대부분의 정책이 장기적 안 목이 아닌 급변하는 상황에 임기응변하는 식으로 집행되기 때문에 문 제가 있다'고 하면서 '국민들의 장기적 안목에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고 했다. 그는 국가를 가족의 확대판으로 보는 공자의 이상을 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켜주는 정치제 도라면 민주주의건 귀족정치건 국가사회주의이건 무방하다고 믿었다.>.
이 당시 이승만의 정치관은 집권한 뒤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 게 되는 박정희와 비슷했다. 민주주의를 하느님과 같은 절대적 가치로 보지 않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 로 본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당시 육군의 장교들은 이미 민주주의란 강력한 외래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 이종찬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있 었던 정래혁 당시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육본의 참모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야당탄압과 계 엄령선포에 반대한 것은 소박한 정의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주 주의를 위해서 싸운다, 민주주의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따라서 독재 는 우리의 적이라는 식이었죠. 그래서 미군과 쉽게 동조하게 되었습니 다.'.
5월31일 라이트너 대리대사는 '(익명을 요구한)저명한 한국군 중장 이 미국 대사관에 대하여 '유엔에 의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 히면서 『만약 부산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을 때 유엔군은 어떤 행동 을 취할 것인가'라고 물어왔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나중에 라이트 너는 미국 정부가 사료로 보존하기 위해 남겨놓은 '역사증언'에서 이 육군중장이 이종찬이었다고 밝히고 이 총장이 '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 획'을 타진해왔었다고 말했다. 라이트너의 보고를 접수한 국무부 북동 아시아과장 영은 '6월2일까지 미국 정부의 태도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 으면 라이트너의 제안은 없었던 걸로 할 수밖에 없다'고 미국무부에 통보했다.
한편 도쿄의 클라크 미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은 31일 미 육 군장관에게 이승만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건의했다. '이승만의 행동이 유엔군의 군사적 목표에 위해를 주지 않으면 우리가 자존심이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파동에 대해서는 외교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 바람 직하다'는 요지였다. 그러면서도 클라크는 유엔군에 의한 계엄령 선포 와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1개 연대를 부산으로 출동시킬 준비를 해놓았다고 보고했다.
이즈음 이종찬 총장 - 이용문 작전국장 - 박정희 차장 계열이 '반 이승만 쿠데타'를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추진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 는 쟁점으로 남는다.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편집인 시인 구상의 증언: '나는 이종 찬, 이용문 두 사람으로부터 따로 따로 의논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용 문은 이승만을 거세하는 거사계획에 적극적이었으나 이종찬은 소극적 이었습니다. 그는 문민우위의 원칙을 깨뜨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도 군의 개입을 말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정래혁 증언: '이종찬 총장이 이용문 국장과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후방에 있는 대대 규모의 국군을 부산으로 보 내 계엄령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총장은 박정희 대령이 이 파병부대를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며칠 뒤 이용문 국장이 보고하기를, '박 대령이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지 휘를 맡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 작전계획의 암호명을 '반정'이라 붙였습니다. 인조반정에서 딴 것이지요.'.
당시 작전국 과장 유원식(뒤에 국가재건 최고회의 재정위원장)의 생전증언: '나는 이용문, 박정희와 함께 2개 대대를 부산에 보내 정권 을 뒤엎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