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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민주주의
 김재규의 민주주의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대령은 저녁 7시20분쯤 궁정동 정보부 시 설의 본관을 나와 정보부장 운전사 유석문에게 차에 가 있으라고 지시한 뒤에 한 울타리에 있는 나동쪽으로 갔다. 대통령을 모신 은밀한 만찬이 열리는 이 건물에는 그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나동으로 뚫린 쪽문에 갔더니 이름을 알 수 없는 경비원이 제지했다.
 
 '비서관님은 나동에 못들어가십니다.' '박 과장 좀 불러줘.'.
 
 경비원은 들고 있던 워키토키 무전기로 연락을 취했다. 의전과장 박 선호(당시 45세)가 나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나동 정원은 컴컴하고 바 닥에 작은 돌들이 박혀있어 울퉁불퉁하였다.
 
 '나는 어디에 가지?' '저쪽으로.'.
 
 박선호는 주방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가니 제미니가 한 대 서 있었 다.공격목표인 주방쪽을 보니 서너 명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의 윤곽만 어리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제미니 안에는 운전사 (유성옥)만 타고 있었다. 운전석 오른 쪽 옆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박 흥주대령은 박선호 과장이 관할하는 경비원들의 얼굴이나 이름은 모르 고 있었다.
 
 말없이 차중에 앉아있는데 곧 한 사람이 오더니 뒷자리로 들어가 앉 았다.
 
 경비원 관리책임자인 해병대 하사 출신 이기주였다.
 
 박흥주는 주방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뒤에 몇 사람이 있나?'.
 
 이기주가 답했다.
 
 '경호원이 3∼4명 될 거예요.'.
 
 박흥주 대령은 주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다 시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이지?' '글쎄요. 음식 나르는 사람인가.'.
 
 박 대령은 흥분상태라서 몇분을 기다리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김재규가 두 박씨에게 암살지령을 내린 뒤 나동 만찬장으로 들어가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김재 규가 박정희 암살의 이유로 든 민주회복이란 말은 그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후에 지어낸 것이란 해석이 강하다. 그런데 김재규가 거사하기 직전에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란 말을 한 사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적어도 그의 뇌리에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란 씨앗이 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그가 암살을 결심하는데 영향을 준 여러 요인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굽이치는 역사적 상황이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는지를 알아보는 데는 좋은 실마리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맹목적 추종을 사대주의라고 단정하고 주체적 입 장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던 사람이 박정희였다.한 국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탄생한 유신체제를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임명되었던 정보부장이 이미 상대방(민주화세력)의 논리에 감염되어 있 었다. 김재규에게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을 확인시켜 준 것은 부마사태였다.
 
 10월17일 늦은 밤, 중앙청에서 소집된 임시국무회의가 부 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하고 있을 때 김재규는 야간비행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야간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광복동 남포 동 중앙동 일대를 관할하는 중부경찰서로 갔다. 시위군중 속에 놓여있었 던 중부경찰서에서 상황보고를 듣고 정보부 부산분실로 돌아가려는데 시 위대 때문에 승용차가 경찰서로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재규는 정 보부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한 20분을 걸어서 차가 기다리는 광복동 쪽으로 갔다.
 
 암흑이 깔린 도심 곳곳에서 시위대가 외치는 함성과 최루 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중심부는 철시상태라 음산하기도 했다. 캄캄 한 뒷골목을 걸으면서 김재규는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는데'라고 혼잣말 로 몇번 중얼거렸다. 수행하던 정보부 요원이 들으니 '물리적으로 해결 하려 해서는 안되고 아무래도 근본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김재규는 이 시위현장의 체험을 통해서 '이 정권의 운명이 다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전쟁, 시위, 화재사건의 현장에 지 휘자가 빠져버리면 상황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김재규는 현장을 목격함으로 해서 부마사태를 실제보다도 더 심각하게 해석하게 되었고 '제2의 4·19가 다가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즉시 18일 저녁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출장보 고를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이 식사하고 있는 자리에서 '부산사태는 체제저항, 정책불신,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며 전국 5대 도시로 확대될 것이다'고 보고를 하자 박 대통령은 화를 내더니 이렇게 말 하더란 것이다(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부산사태 같은 것이 또 생기면 이제는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내렸다가 사형되었는데 대통령인 내가 내리는데 누가 나를 사형시킬 수가 있겠는가.'.
 
 옆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을 죽여도 까딱 없는데…' 라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의원직 제명 전날인 10월3일 박준규 공화당의장서리, 태완선 유정회의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정보부장은 신라호텔의 한 방에 서 만나 다음날의 전략을 논의했다. 김 실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 모 대사관에서도 전화가 왔는데 김 총재의 제명을 재고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이 지금 각하를 뵙고 재고해 달라고 건의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 이때 차지철이 나타났다. 그는 이야기를 듣더니 펄펄 뛰었다.
 
 '방금 각하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각하의 뜻은 절대로 제명쪽입니다.'.
 
 이러니 청와대행은 포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김재규는 김영삼 을 위해서 마지막 노력을 해본다. 남산에 있는 공관으로 김영삼 총재를 극비리에 초청하여 한 시간 동안 간청하다시피 했다. 김영삼 총재가 1987년에 기자에게 전한 대화의 요지는 이러했다.
 
 '김 부장은 전날 대통령과 장시간 나의 제명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서, 내일 아침 자연스럽게 기자들과 만나서 뉴욕타임스 기사에 대한 해명을 해주면 이걸 명분으로 하여 제명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보 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거부했습니다. 김 부장은 애원조로 사정하다시 피 했습니다. 그는 몇번이나 '그렇게 하면 나라도, 김 총재도, 대통령 도 불행하게 됩니다'라고 했어요.'.
 
 김재규는 야당이나 학생세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무리를 안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더러 나타나고 있다. 김재규는 권력에 맹목적으로 추종 하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가 1979년에 즐겨 썼던 붓글씨 '자유민주주 의' '민주민권자유평등' '위민주정도' '위대의' '비리법권천' 같은 것 들도 그의 심리를 엿보게 한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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