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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추락사… 박, 유족 생활비 보태
 비행기 추락사… 박, 유족 생활비 보태
 
 1953년 6월24일 밤, 대구 영남일보 주필 구상은 이용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가 박정희 대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요지였다.
 
 '반내미 자식아, 죽긴 왜 죽어!'.
 
 이런 말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이용문 남부경비사령관은 이날 오 후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남원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이 장군이 '이 렇게 날씨가 나쁜데 뜰 수 있겠나'하고 조종사에게 물으니 조종사는 '운봉만 넘으면 대구까지는 훤히 뚫렸습니다'라고 했다. 이용문은 부 사령관 유해준 대령과 바둑을 두다가 느릿느릿 비행장으로 향했다.빗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해준은 한참 있다가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를듣고는 '이 장군이 비행장에서도 상당히 지체했구나'라고 생각 했다. 저녁식사 중인 유해준에게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운봉 고개 에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죽은 사람은 미군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대구 비행장으로 연락을 해보니 이용문의 비행기는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얀 이용문을 미군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25일 아침에 현장에 도착 한 이용문의 장남 이건개(자민련 국회의원)에 따르면 비행기는 논두 렁에 기체의 앞부분이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용문은 뒷자리에서 죽어 있었다. 조종사도 사망했다. 이용문은 그때 서른일곱이었다.
 
 이용문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정희는 그를 추대하여 쿠데타를 했 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존심 강한 박정희가 진심으로 복속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이용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이용문의 유족에 대해서박정희는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박정희는 이용문의 기일이 되면 꼭 육영수와 함께 미망인 김 정자의 집에 들러 한참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자신도 가난에 쪼들 리고 있으면서 돈을 모아 유족의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5·16 뒤 대 구 근교에 있던이용문의 묘소를 수유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회의 위원 장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었다. 이용문의 동상을 세울 때 돈을 모 으기 위해서 연고자들에게취지문을 보냈는데 박정희, 구상 명의로 되 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매년 주최하는 '이룡문장군배쟁탈승마 대회'는 기병장교 출신인 이용문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이 행사도 박정희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장남 이건개 검사를 불러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한 뒤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내 보낸 것도 박정희였다.
 
 박정희 대령은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광주에서 창설한 3군단 포병단 요원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다. 당시 군단장은 강 문봉 소장이었다. 강문봉은 박정희보다 여섯 살이 아래였고, 만주군 관학교2년 후배였지만 조선경비대에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상관이 되 었다. 박정희는 상관대접을 깍듯이 했지만 속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1975년에 강문봉은 '정일권 대통령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수뢰 죄로 구속되고 징역을 살았다. 이 사건은 정일권-강문봉 콤비에 대한 박정희의 의심을 받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3군단 포병단장 시절 박정희의 전속부관은 '새박사'로 유명한 원 병오(경희대 교수) 중위였다. 원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는 포병단에 파견된미군 고문단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미군 장교가 턱 도 없는 참견을 한다 싶으면 우리말로 '그 잠꼬대 그만하라고 해!'라 고 소리를 질렀다.
 
 통역장교는 적당히 통역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미군고문단은 한 국군 취사장에서 한 2백m 떨어진 위쪽에 변소를 지으려고 했다. 박 대령이 따졌다. 미군 측에선 지하수에 분뇨가 스며들지 않게 하겠다 고 했다. 박정희는 '밥짓는 데 가까이 변소를 내는 것은 우리 풍습에 어긋난다. 한국 땅에서는 한국 풍습에 따르라'고 하여 끝내 못짓게 했다. 박 대령은 고문단장 베이커 중령이 자신에 대해서 나쁜 보고를 상부에 올린 것을 알고는 베이커 중령을 불러 꼬치꼬치 따지기도 했 다.
 
 그때 부단장은 낙동강 전선에서 귀순해 왔던 인민군 포병중좌 출 신 정봉욱 대령이었다. 미군에선 남로당 전력자와 인민군출신이 같이 근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정 대령을 다른 부대로 보내도록 했다.박정희는 '정 대령이 귀순한 것은 인민군이 유리할 때인데 그를 의심해선 안된다'고 변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정봉욱은 나중에 5·16 거사에도 가담했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전속부관 원 중위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부하들에게 '손찌검이나 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쓴 가장 큰 욕은 지휘봉으 로 철모를 가볍게 치면서 '밥통!'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원병오는 담 대하게만 보이는 박정희 단장이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다는 점도 발 견할 수 있었다. 상관들에게 브리핑할 때는 긴장하여 손을 떨곤 했다 는 것이다.
 
 1953년3월 스탈린이 죽은 뒤 판문점의 휴전협상은 포로 처리 문 제에 대해 중공 측이 크게 양보하는 바람에 급진전하기 시작했다. 휴 전을 반대해온 이승만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의 체결 등 몇 가지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4월24일 미국 정부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휴전협정 후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게 되면 한국군은 유엔군의 지휘로부터 이탈, 독자행동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것이 공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반공포로들을 석방,막바지에 이른 휴전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황한 미국정부는 1년전 부산정치파동 때 작성해두었던'이승만 제거계획'을 다시 꺼내 보완하는 한편,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한 상호방위조약의 체결도 검토 하기시작했다. 이승만이 휴전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군을 단독으 로 북진시킨다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5월30일 '이승만 제거계획'을 버리고 '한미상호방위협정 체결'이란 회유책을 선택한다. 1년 전 부산정치파동 때 미국 측이 희망했던 대로 친미적 인 장면이 새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이렇게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한국 정부가 조용하게 미국의 요구대로 휴전을 받아들였다면 휴전 이후의 한국은 1973년 파리 평화협정 체결 이후의 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아이젠 하워정부가 '단독북진'이란 시한폭탄을 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은 결국에는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도 이승만을 미워했던 미국은 지금에 와서는 이승만의 그 악착같았던 도전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제7부 '가난한 군인의 길'이 이어집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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