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와 단란한 신혼…52년 근혜낳아
1952년 여름 전선은 38도선을 따라 교착되어 쌍방 일백만명이 넘는 중무장한 군대가 서로를 부벼대고 짓이기는 고지 쟁탈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기동전보다도 더 참혹한 고지전, 참호전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박정희는 부산정치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정된 가정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1952년 7월2일 밤에 쓴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란 시가 있다.
<밤은 깊어만 갈수록 고요해지는군 / 대리석 같이 하이얀 피부 /복 욱(꽃다운 향기)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을 뿜는 듯한 그 얼굴 / 숨소리 가늘게, 멀리 행복의 꿈나라를 거니는 /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 굴 더욱 예쁘고 / 평화의 상징! 사랑의 권화여! / 아! 그대의 눈, 그 귀,그 코, 그 입 / 그대는 인과 자와 선의 세 가닥 실로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진저 /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 지언정 / 길이 빛나고 길이 아름다워라.
나의 모든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착되어 / 한 개 사나이의 개성 으로 세련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써 /인 생코스가 되어주오.
그대 편히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 이 밤이 다가도록 새날이 오 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이 행복한 시간을 /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존경심에 가까운 사랑을 소박한 시어로써 고백한 이 글을 읽어보면 박정희는 육영수로부터 일종의 모성애까지 느끼고있었던 것같다. 박정희의 행복감을 더욱 충만시켜준 것은 이때 생후 다섯 달이 된 딸 근혜의 존재였다. 그 전해 육영수는 근혜를 임신하고 입덧을 시 작하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겠지만 틈만 나면 빨래를 했다고 한다.
손가락 끝이 갈라질 정도였다. 밤에는 털실로 뜨개질을 하여 아기옷을 미리 짜두었다. 1952년 2월1일 저녁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육영수가 산통을 시작했을 때 처제 육예수와 장모 이경령은 집에 없었다. 박정희 는 산파를 불러 안방으로 들어가게한 다음 옆방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아내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참다 못한 박정희는 안방으 로 들어갔다. 육영수는 책상 다리를 붙들고 힘을 주고 있었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저렇게 고생하는 걸 차마 못보겠는데 어떤 방법이 없습니까.' '잠시만 참아요.'.
산파는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박정희는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아내의 손을 잡고 지키고 있었다. 새벽에 출산, 딸이었다. 아침에 처제 육예수가 돌아왔다. 한동안 박정희는 점심 때에 일부러 집에 들러 식사 를 하고 처제와 함께 근혜를 목욕시켜주기도 했다. 박정희는 딸의 성장 과정을 담아두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름은 박정희가 옥편을 뒤져 서 지은 것이다. 무궁화 근자는 '조국'을 가리킨다.
박정희와 이혼한 김호남 사이에서 난 첫 딸 재옥은 이즈음 고향(선 산군 상모동)에서 살면서 주로 편지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의 집에 살 때 재옥은 아버지에게 원망하는편지를 자주 썼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 살아야 합니까. 사촌오빠가 저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 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 고저도 힘들고요.'.
이런 편지에 대해서 박정희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사는 것 이니 열심히 살아라'는 요지의 답장을 학교 공납금과 함께 보냈다. 박 재옥이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구미여중에 다니고 있던 때였 다.근혜가 태어난 직후였다. 재옥은 집안 어른이 전해주는 그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벌써 오래 전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 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용문 준장이 작전국장에서 수도사단장으로 나간 석달 뒤인 1952년 10월에 포병으로 전과했다. 당시 육군 포병감 신응균(육군 중장 예편)은 포병을 증강하면서 군단 포병단장 요원으로 고참대령 10 여명을 뽑아 교육시켰는데 그 가운데 박정희가 들어 있었다. 이로써 박 정희는 그 뒤 장성 진급이 유리해졌다. 포병장교들은 당시로선 비교적 지식 수준이 높았다. 포병 장교들은 업무상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의 소 유자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무기는 짧을수록 배신한다'고 말하곤 했다.
권총이 배신을 많이 하고 대포를 가진 포병은 충직하다는 농담이다. 박정희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넉달간 교육을 받았다. 육영수는 딸 근혜 를 포대기에 감싸안고 광주로 따라가 동명동에서 셋방을 얻었다. 박정 희는 1953년 2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물면서 신설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5월9일엔 3군단 포병단장으로 전 보되어 조직과 인원편성을 하기 시작했다. 9사단 창설때도 산파역을 한 적이 있는 박정희는 조직하고 건설하는 일과는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1953년 6월24일 오후 당시 대구에서 영남일보 주필로 있던 시인 구 상에게 박정희 대령으로부터 인편으로 연락이 왔다. '오늘 오후 이용문 장군이 남원에서 대구로 날아 온다고 하니까 퇴근하지말고 기다렸다가 우리 셋이서 한 잔 하자'는 요지였다. 당시 이용문 준장은 남원에 사령 부가 있는 남부경비사령부 사령관이었다. 군과 경찰을 지휘하여 지리산 의 공비토벌을 하고 있었다.
이용문 장군은 작전국장에서 수도사단장으 로 전보되어 석달간 수도고지 전투를 치르고 1952년 10월20일에 남경사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수도 고지는 강원도 금성군에 있는 해발 6백m의 작은 산이었다. 전략적으로는 큰 중요성이 없다고 판단된 이 고지를 중 공군이 빼앗아가자 격전이 벌어졌다. 이용문 사단장은 이 전투에 열심 을 내지 않았다. 그는 '이 정도 고지에 이런 출혈을 할 필요가 과연 있 는가'하는 회의를 가졌던 것 같다. 유재흥 2군단장은 '이용문 사단장의 부대장악이 극히 불량하여 그를 송요찬 장군으로 교체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회고록).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