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개헌… 이종찬-이용문 제거
1952년 6월 21일 장택상 총리가 조직한 신라회소속 국회의원들은 사 실상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인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장택상 총리측은 이런 말로써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면 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을 감금하고 군정을 실시하려 할 것이다. 군정보다는 발췌개헌이 낫지 않은가. 독안에 든 쥐를 잡으려고 독까지 깰 수는 없지 않은가'.
6월 24일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이승만과 요담한 뒤 그 내용을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경유하여 미국방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야당이 미국측이 자신들을 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 람에 문제해결이 늦어지고 있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또 '국 회를 해산하지 말라는 미국측의 요청을 어떻게 하든지 수용하려고 하다 가 보니까 일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색을 냈다.
이 대통령은 또 '신태 영 국방장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후임자를 찾고 있다. 손원 일 해군참모총장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손 제 독이면 저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밴 플리트는 '대통령은 자신에 넘쳐 있었고 결국은 이번 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국회에서의 개헌안 표결이 다가오고 있던 6월 25일 미합참은 흥미있는 전문을 도쿄 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내려보낸다.
<지금의 한국 정세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악화되어 유엔군의 군사작전이 방해를 받을 경우에 대비한 계획을 다음 기준에 따라 작성 하여 보고하라. 그러한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유엔의 한국위원회, 주한 미국대사관, 유엔군 사령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승만이 거절하면 유엔군 사령부는 유엔 한국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미국정부에 대해 한국의 내정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미국 정부가 동의하면 유엔군 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첫째, 한국군의 육군참모총장에게 육군과 경찰 및 유사 군사단체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 게 한 다음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정책상 한국군만 동원하도록 한 다.
둘째, 한국군이 계엄령을 선포한 뒤에도 한국 정부의 주권이 살아있 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하며 조속히 민간정부로 복귀하도록 한다. 이상 과 같은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한국 육군의 참모총장을 믿을 수 있을 지의여부를 판단하여 보고하라.>.
이 지시는 '실시준비 명령'이 아니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비상조치 계획의 작성을 지시한 것이다. 클라크가 작성한 계획은 합참으로부터 지시받은 기준을 다소 수정한 것이었다. 즉, 군사개입의 주체를 한국군 에서 유엔군으로 바꾸었다. 클라크는 '만약 한국군을 그런 목적으로 동 원했다가는 내전의 위험성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승만을 몇 가지 구실을 붙여 서울로 유인한 다음 그 사이 유엔군 이 부산 임시수도에 진주하여 '이승만의 독재적 행동'을 도와준 50∼ 1백명의 인사를 체포하고 이승만의 추인을 받든지 만약 그가 추인을 거 부하면 장택상 총리에게 이를 요구한다. 총리도 추인을 거부하면 유엔 군 사령부 아래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군정을 실시한다.>.
클라크는 이 계획안을 7월 5일 미합참에 보냈다. 그 하루 전에 국회 는 장택상 총리가 제안한 발췌개헌안을 1백63명의 기립찬성, 기권 3표 로 가결시킴으로써 이승만에 굴복하고 재선의 길을 터주었다. 따라서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해소된 다음에 비상계획안이 올라 간 것이다. 클 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의 재집권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워싱턴에 서 계속 강경론을 펴니까 마지 못해 따르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기 때 문이다. 주권국가의 대통령을 유인하여 납치한다는 과격한 내용을 담은 이계획은 합참의 금고 속으로 들어가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붙들 고 늘어질 때마다 꺼내보는 문서가 된다.
부산정치파동은 그 뒤 우리나라에서 계속되는 정쟁의 전형이 되었다. 즉, 집권자의 독주를 야당이 공격하면 집권자는 미국의 앞잡이라고 야 당을 공격한다. 미국 정부는 미국식 정치이념을 잘 따르는 야당을 지원 하는 척하지만 집권자가 상황을 장악하면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런 독재와 사대주의 논쟁이 되풀이되는 것은 주체적 정치철학에 근거 하여 자신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나라의 정치 문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에 성공하자 7월 23일 이종찬 육군참모 총장을 해임하고 3군단장 백선엽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용문 국 장은 수도사단장으로 나가고 장창국 준장이 들어왔다. 반이승만 입장이 강했던 김종평 준장은 제주도 훈련소 부소장으로 좌천되었다. 박정희 대령은 유임되었다. 그는 아직 이용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미군은 이종찬이 국내에 남아 있으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도록 주선했다.
이용문은 이임식에서 작전 국 직원들에게 '군인은 정치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알 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로써 박정희는 이종찬, 이용문과 헤어지게 된다. 이용문이 일찍 죽은 뒤 박정희는 이종찬(당시 육군대학총장)을 추대하는 쿠데타 계획을 추진한다. 자존심이 강한 박정희가 그래도 높 게 평가한 두 선배 장군이 이용문, 이종찬이었다. 이용문이 일찍 죽지 않고 이종찬이 적극적이었으면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로는 등 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용문은 거침이 없이 활달하고 이종찬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박정 희는 겉으론 강직한 모습이지만 아주 유연한 정신을 품고 있는 이였다. 이용문과 박정희는 규칙을 부수면서도 이 세상을 개조해보겠다는 야심 을 지녔으나 이종찬은 군인으로서의 윤리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당시 한국군에서 가장 뛰어난 인격과 식견을 지녔을 세 사람이 육군의 명 령계통을 장악하고 있을 때 쿠데타의 기회가 왔다가 스쳐 지나갔다. 그 세사람 가운데 두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지만 박정희에 게는 다시 온다. 쿠데타 때 미국의 태도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 의 이경험은 산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