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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실 생활
 포트 실 생활
 
 육군포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미군들과 싸웠고,이것이 그의 반미 성 향을 심화시켰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박정희는 언제나 그러하듯 모범생이었다. 그는 영내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인이나 외부 와의 접촉을 활발하게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다른 한 준장과 함께 유 학생반의 선임자였다. 미국인들에 대해서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장교가 있으면 조용히 숙소로 불러 주의를 주는 정도였지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지 는 않았다. 박정희 준장 바로 옆방을 썼던 임상균 중령은 혼자 있기를 좋 아하고 과묵한 박정희가 어렵게느껴졌다. 박정희는 가끔 임 중령 방의 문 을 두드리고는 '맥주 좀 사다 줘'라고 했다. '저 양반또 돈이 떨어졌구나' 라고 생각한 임 중령이 자기 돈을 내 사다주면 박정희는 혼자서 마셨다.체 재비를 받을 때마다 박정희는 임 중령에게 맥주값을 정확히 계산해주었다.
 
 임 중령은 동전을 넣는 세탁기로 빨래를 직접 하는 박정희가 안쓰럽게 보 여 다리미질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박정희는 유학생들이 텍사스주 댈러스 로 단체여행을 갈 때도 빠졌다. 아마도 돈이 없었기때문일 것이다. 박정 희는 미군들이 주최하는 파티장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한번은 드물게 미군 대위 부부가 초청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부부가 무슨 일이 생 겨 먼저 떠나는 바람에 부대로 돌아올 길을 몰라 고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영어 실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박정희는 적극적으로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상균 당시 중령의 증언--.
 
 '우리 학생들은 월 1백50달러를 체재비로 받았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점심값을 아끼려고 굶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공부를 열심 히 하고 숙소에 돌아오면 조용히 지내니 옆방에 있는데도 함부로 말을 붙 이기 어려웠습니다.'.
 
 박정희 3군단 포병단장의 작전참모였던 오정석은 포트 실에서 정말로 배운 것은 포술학보다는 미국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미국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과 며칠 함께 생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 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 에 무척 놀랐습니다. 늦은 밤에 인적도 없는데 빨간 신호등에 멈춰서는 자 동차, 스쿨버스가 지나가면 속도를 줄이는 차들을 보고 '아하, 사람 사는 데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기생들끼리 모이면 '이러다가는 친미파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많은 한국군 장교들은 왜 도로에 중앙선이 있어야 하는 지, 들이받힌 자동차를 몰던 장교가 들이받은 자동차를 몰던 부하를 왜 두 들겨패주지 않고 무슨 서류에 사인만 하고 보내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1954년 4월25일 박정희 준장이 쓴 일기--.
 
 <포트 실(Fort Sill)의 일요일. 고국을 떠나온 지 3개월. 고국산천에 서 백설이 분분하고 찬 바람이 살을 에일 듯하던 날 대구공항을 떠났는데 벌써 초하를 맞이하게 되었다. 포트 실은 봄 여름을 구별하기 어려운 고장 이다. '춘시춘비사춘'이라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은 봄이었다. 4월20일 경부터는 훈풍이 넘실넘실 나뭇가지를 스치며 분명히 초하의 면목을 갖추 었다. 서늘한 나무그늘이 그윽하고 신선한 경치를 만들어서 산책하는 이의 발걸음을 상쾌하게 한다. 영수와 근혜를 생각하며 한적한 숙사에서 향수에 잠겨본다.>.
 
 유학생들이 도시구경을 나가고 혼자 영내에 남아서 그 한적함을 즐기면 서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는 박정희의 모습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혁명가와 는 다른 조용한 인간형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성정은 침착과 사색을 바 탕으로 하는 결단과 행동이었다. 결정적 시기에 보여준 그의전광석화 같은 행동의 밑에는 기나긴 준비의 세월과 고독한 사색의 축적이 있었다.
 
 박정희가 유학을 떠난 후 전속부관 원병오(경희대 조류학 교수)중위는 2사단 포병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육영수가 인편으로 '쌀이 떨어 졌다'는 연락을 전해 왔다.
 
 '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 배고픔이란 것을 절감하지 못했 어요. 왜 육 여사가 남편 부하에게 이런 구차한 부탁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다소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니 저 같은 사람 에게 부탁할 정도라면 얼마나 다급할까 싶어 26사단 김재춘(중앙정보부장 역임) 참모장을 찾아갔지요. 쌀 한 가마와 1만 환을 주면서 육 여사에게 갖다주라고 하더군요.' 박정희는 귀국을 앞둔 6월14일 이런 일기를 썼다.
 
 <번잡한 서울 한 모퉁이에서 내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영수! 인천부두에서 기다릴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맞아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 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도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불원 우리 가정에는 새로운 희보가 기다리고있다. 남아일까 여아일까.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남아일 때는 태평양상에서 본 구름과 같은 기운을 상징시켜 운자를 넣을까. 시운, 수운, 일운, 일운, 일 훈. 여아일 때는 근숙, 운숙, 근정, 근랑, 운희. 결정권은 영수에게 일임 하자.>.
 
 박정희 일행은 6월 하순 시애틀에서 미군 수송선 제너럴 포프호를 타 고 태평양을 건넜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하룻밤을 잔 뒤 규슈 남단을 돌아 인천으로 향했다. 박정희는 선수 쪽 좋은 방을 쓰고 있었다. 6월26일 박정 희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갑판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제주도가 보였 다. 박정희는 반년 만에 보는 조국을 스케치했다. 그는 '내일이면 그리웠 던 조국강토에 제1보를 디디게 될 기쁨, 부두에 마중나온 사랑하는 처자의 모습을 그리면서 선실에서의 마지막 잠을 재촉했다.'(일기).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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