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와 월북사건
1956년 5월15일로 예정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전군은 선거열풍에 휘말렸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란 구호를 앞세운 민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장면 부통령 후보는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수 십만의 청중을 동원했다.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은 '구관이 명관이 다'라는 구호대로 방어적인 자세로 대응했는데 민심의 대세가 신익희 쪽으로 기우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군인표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송요찬 3군단장은예하부대를 돌아다니면서 이승 만을 지지하라는 독려를 했다. 박정희 사단장은 군단장으로부터 선거 운동을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박정희가 참모회의에 이 문제를 부쳤더니 찬반이 엇갈렸다.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 '선거에 관한 한 지금부터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사단장이 나서서 선거운동은 할 수 없지만 사단 특무대가 설치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막지 않겠다는 소극적 저항이었다.
'그 정도의 저항이라도 한 사단장은 그분 뿐이었을 것입니다.'.
윤필용 당시 군수참모의 말이다. 사단장이 움직이지 않으니 송요찬 군단장이 내려와 소대원들을 모아놓고 이승만 지지를 역설하고 다녔다.
사단사령부에서 모의투표를 해보니 90% 이상이 신익희 후보 지지였 다. 그 신익희가 5월5일 호남선 열차안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자 박정 희를 비롯한 사단사령부의 많은 장교들은 아쉬워했다. 그 직후 군단 정훈장교가 5사단 사령부로 내려와 강당에 사병들을 모아놓고 선거운 동을 했다.
'신익희는 죽었고 조봉암은 기권했다. 이제는 찍을 사람이 이승만 박사뿐이다. 야당은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영국 신문이 보도하기 를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 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작전장교 조규동 소위가 '질문이 있습니다'하고 손을 들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다 봤는데 조봉암 후보가 기권했다는 기사는 없 던데요.'.
장내에서 폭소가 터졌다. 5월15일의 투표는 군대에선 사실상의 공 개투표였다. 투표소에 입회한 감독자에게 사병들은 자신의 기표용지를 보이고는 투표함에 집어넣어야 했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5사단에 서도 이승만-이기붕 지지는 99.9%를 기록했다. 그런 감시가 덜했던 사 단사령부에선 이승만의 득표율이 50%를 밑돌았다. 이승만은 유효투표 수의 약 52%를 얻어 당선되었다. 죽은 신익희에 대한 일종의 추모표가 약 20%나 달해 민심의 향방을 보여준 데다가 부통령으로는 장면이 당 선되었다. 1956년의 이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예고한 전환점이 었다.
5·15선거 며칠 뒤 5사단 지역 비무장지대의 한 초소장이 당번병을 데리고 월북하는 사고가 났다. 이 급보에 접한 박정희는 상황장교 고 택근 중위, 전속부관 한병기 중위를 데리고 초소로 갔다. 운전병 이타 관이 모는 지프가 사고 초소에 당도했을 때는 날이 어둑했고 벌써 북 측 확성기는 두 사람의 입북을 선전하고 있었다. 월북한 소대장은 사 단장, 연대장, 중대장 앞으로 편지를 세 장 남겼다. 박정희는 읽어보 더니고 중위에게 말없이 넘겼다. 사령부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박정희 는 독백하듯이 내뱉었다.
'바보같은 놈들, 난들 어떻게 해.'.
당시 5사단 정보처 보안장교였던 이성범 중위의 기억에 따르면 편 지의 요지는 이러했다.
<사단장 앞 편지: 박정희, 너 이번 선거를 어떻게 치렀는지 잘 알 지.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돌아와서 너를 심판하겠다. 연대장 앞: 연 대장, 너는 이번 선거를 어떻게 치렀는지 잘 알겠지. 우리는 머지 않 아 다시 돌아와 너를 처단하겠다. 중대장은 죄가 없으니 처벌하지 말 라. 중대장 앞: 폐를 끼쳐 미안하다.>.
이성범 중위는 이 사건을 조사한 사람인데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월북한 소대장은 경남 진주 출신인데 부산의 모 대학을 졸업했습 니다. 투표 일주일쯤 전에 애인이 임신을 하여 면회를 온 적이 있었습 니다. 사상적인 동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973년 무렵에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검거된 것으로 압니다.'.
사고는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사단사령부 근무 작전 장교 조규동 소위는 월북사건이 난 그 주 토요일에 가짜 출장명령서를 만들어 서울 로 나왔다. 5사단에서 벌어진 부정선거에 울분이 복바쳐 견딜 수가 없 었다. 다음날 조선일보 편집국을 찾아갔다. 거기서 홍종인 주필을 만났다. 일본에서 오래 살아 우리 말 발음이 서툴렀던 조 소위는 목청을 높여 투표부정을 설명했다. 잠자코 듣고 있는 홍종인 주필을 찾아온 손님둘이 있었다. 육본 정훈차감과 육군특무대 고위간부였다.
두 사람 은 옆자리에 앉아 홍종인의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조 소위 의 말을 엿듣게 되었다. 홍 주필은 두 사람을 향해서 '당신들 이 말 들었지. 이래도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특무대 간부가 가만히 밖으로 나와 5사단 특무대로 전화를 걸었다. 사단 특무대에서는 이성범 중위 에게 연락했다. 이 중위는 조 소위의 독신자 숙소를 뒤졌다. 별다른 자료가 있을 리 없었다. 조 소위는 월요일 밤에 귀대했다.
박정희는 이날 아침 참모들에게 신경질을 냈다.
'부하 장교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이게 뭐야. 조 소위 들어오면 영 창에 집어넣어!'.
박정희는 그러나 사단특무대장이 조 소위를 연행하여 조사한 뒤 구 속하겠다고 하니까 '내가 확인하지 않았으니 가만 있어'라고 제지했다. 참모회의에서 윤필용 군수참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때를 잘못 만나 그렇지 부정을 고발한 조 소위에게는 훈장을 주어 야 합니다.'.
박정희는 작전참모 이근섭 중령에게 말했다.
'특무대에 두지말고 작전참모 집에 데려다 방 하나 주고 감시하면 서 선도하시오.'.
며칠 뒤 이 중령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이 이렇게 좁아서 안 되겠어.
그러니 헌병대 숙소에 보내줄 테니 거기서 말썽 부리지 말고 있어' 라고 했다. 조 소위는 헌병대 장교숙소에서 일종의 연금생활을 하게되 었다. 그는 여기서 작전장교의 일도 거들어주고 식사도 잘했다. 열흘 쯤 지나자 박 사단장이 불렀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