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禍
박정희의 셋째 형으로서 대구폭동 때 죽은 박상희의 미망인 조귀분 은 큰 딸 박영옥을 김종필에게 시집보내고도 다섯 자녀를 키운다고 모진 고생을 하고 있었다. 조씨는 그때 군인가족들에게 지급되던 양곡표 라도 얻어달라고 박재석(박정희 둘째 형의 장남)을 시동생에게 보낸 다.
1955 년 겨울 구미국민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열고 있던 박재석이 5사단 사령부를 방문하니 바싹 마른 부관 한병기 중위가 나왔다. 사 병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부관인데 사단장님 영어선 생이기도 하다'고 했다. 박정희 사단장은 그날 조카를 부관과 한 방에 재웠다.한 중위는 동상에 걸려 있었는데 밤에는 콩을 담은 자루를 발가락에 대고 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동상이 풀린다고 했다. 1956년 1월31일 박정희는 부대를 찾아온 박영옥을 통해서 박재석에게 편지를 보낸다.
<재석군, 엄동지절에 더욱 건승을 빌며 집안이 다들 무고한지 궁금 하다. 전번 귀군이 이야기하고 간 군인가족 식량배급표는 서울지구에 있는 경리대에서 별지확인증을 얻어왔으니 이것을 가지고 대구 제2지 구 경리대에 가서 통장을 얻어오면 매월 식량을 수령할 수 있다 한 다.이 확인증을 가지고가서 통장을 받도록 하여라. 1월31일 숙부서.>.
별지의 메모장에는 박정희가 대구지구 경리대장 앞으로 보내는 글 이 적혀 있었다. '이 확인증을 지참하는 박재석에게 식량 통장을 교부 하여 주시기 앙망한다'는 내용이다.
1956년1월30일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서울에서 출근길에 저 격을 받고 사망했다. 강문봉 2군사령관-허태영 서울지구병사구 사령관 (대령)이 암살 지령자, 사병 두 명이 실행자로 밝혀졌다. 군법회의에 서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강문봉만은 이 대통령에 의해 무기징 역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대통령의 신임을 업고 정일권 육군참 모총장 계열의 비리를 캐던 김창룡을 정일권의 측근인 강문봉이 제거 한 사건이다. 군내의 파벌싸움, 부패, 정치화를 복합적으로 보여준 사 건이다. 박정희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김창룡 암살에 접하자 큰 충격을 드러냈다.
'허, 그 사람이 그렇게 죽다니… 참, 내가 사형받을 뻔했는데 그 사람 덕분에 살아났는데 말이야'.
1956년2월27일 3군단은 군단 지휘부 기동훈련(CPX)에 들어갔다. 강 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북쪽으로 한 6㎞ 떨어진 북면 송학리에 있던 3군단 예하5사단 사령부에서도 모든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상황실에 모 여 도상훈련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전 날부터 시작된 눈이었다. 박정희 사단장은 훈련에 신경을 쓰다보니 폭 설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은 다음 날에도 내렸다. 전방고지의 적 설량은 1m를 넘어서고 있었다.
사단과 휘하 부대와의 전화선은 들러붙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고 있었다. 29일 오전에 눈이 일 단 그쳤을 때 적설량은 3∼6m나 되었다. 이날 아침 작전 장교 조규동 은 상황실에서 작전참모 이근섭 중령이 불러 문을 열고 나가다가 기겁 을 했다. 눈이 키 높이까지 쌓였는데 불과 30m를 헤쳐 상황실까지 가 는 데 15분이 걸렸다. 조 소위의 보고에 놀란 박정희 사단장이 바깥으로 나와 보고는 군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상훈련의 중단을 건의하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유선통신망이 마비되어 예하 부대와 연락 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제설작업과 구조작업이 시작된 것은 3월3일부터였다. 사상최악의 폭설은 6, 5, 3사단 지역을 강타했는데 특히 5사단이 심했다.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고지에 고립된 부대로 식 량을 공중공급했다. 박정희는 이런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설중에 건투하는 제군들의 노고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 다.
1. 며칠만 더 참으면 이 난관을 타개할 것이니 불절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라.
2. 상급, 인접부대와 통신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3. 급한 환자가 생기면 백방으로 노력하여 상부에 보고하라.
4. 식량이 부족하면 완전히 소비하기 전에 여하한 수단을 사용하여 서라도 신속히 보고하라.
5. 눈이 내릴 때도 위험하지만 눈이 녹을 때 더 위험하다. 벙커와 막사에 대하여 주의하라.
6. 제설작업 때 손발이 오래 젖어 있으면 동상에 걸리니 주의하라.
7. 먼 곳에 혼자 가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8. 통신이 잘 되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제군들의 생명을 구출할 수 있으니 유선무선을 통하는 데 노력을 다하라. 축 건투, 사단장 준 장 박정희.>.
제설작업을 하던 중 36연대 7중대 소속 소대장 이규홍 중위 외 8명 의 사병이 눈 속에서 걷는 자세로 얼어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폭 설이 쏟아지던 2월28일 밤 한 소대원이 탈영했다. 이 중위는 소대원 7명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 탈영병을 붙잡아 돌아올 때 헌병검문소를 피하기 위해 산길을 걸어오다가 폭설에 파묻힌 것이었다. 이규홍 중위 는 선두에서 진로를 개척하다가 자신의 부대가 가까워지자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신호를 보냈으나 수십m 전방에 있던 부대에서는 폭설로 이 총성을 듣지 못했다. 수십 발의 탄피들만 눈 속에서 발굴되었다.
토치카나 영구 막사에 있던 장병들은 무사했으나 숯을 굽는다고 가건물을 지어놓고 잠자던 장병들은 지붕이 무너져서, 진지호에서 숯불을 피워 놓고 잠자던 장병들은 가스 중독으로 죽거나 막사가 눈에 파묻혀 질식 사한 사병들도 있었다. 당시 전방 사단에서는 이른바 후생사업의 하나 로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어 민간인들에게 팔고 그 수입은 장교들이 나누어 갖고 있었다.
5사단에서만 모두 59명이 죽었다. 3군단 전체에서는 1백18명이 죽고 1백47명이 다쳤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설화 현장을 시찰했다. 박정희가 '각하, 면목이 없습니다'고 보고하니 정 총장은 '그래도 박장군이 있었기에 이 정도로 그쳤다'고 오히려 위로했다. 박정희는 나중에 '총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부하들에게도 부드러운 말이 나가게 되더라'고 회고했다. 1군 사령부에서는 3사단장 정래혁과 박정 희에게 설화대책에 고생했다고 표창장을 주었다. 박정희는 '부하들을 떼죽음시켜놓고 무슨 낯으로 상을 받겠나'라면서 부사단장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