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부관 한병기
딸 육영수의 노량진 문간방 시절이 가장 비참했다고 어머니 이경령은 회고한 적이 있다.
'방엔 불도 들이지 못하고 방바닥에서 물이 줄줄 나서…그때 군인들 이 비옷으로 쓰던 장옷을 방바닥에다가 깔면 축축하게 누기가 차서 도무 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성거리고, 밥이라고는 풍로에 다가 해서 끼니라고 때우고, 그때 참말로 고생을 말없이 하고요, 손녀 딸근혜는 아파서 울고요….'.
육예수는 언니와 함께 살면서 도끼로 장작을 패는 법도 배웠다. 십구 공탄이 아직 널리 보급되기 전, 부대에선 장교들 집에 장작을 갖다주곤 했다.
광주로 내려가기 전 서울 고사북동에 살 때 두 자매는 물 때문에 고생했다.
'집 아래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 와야 했는데 해가 뜨면 주민들이 물초롱을 물지게에 지고 내려와 끝도 보이지 않게 줄을 서곤 했어요. 언 니와 저는 창피해서 긴 줄을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물 을 받아지고 올라 왔습니다. 언니와 저는 매번 미끄러져 옷이 젖곤 했는 데 겨울엔 집에 와서 보면 옷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말이 장성 집이지 최하층 빈민 생활이었습니다. 장작이 떨어지니 돈도 떨어지고요. 그때 우리가 지내던방은 '뼈가 얼던 방'이었습니다. 영하 20도까지 내려 가는 추위를 어떻게 견뎠는지… 그때 그 시절은 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이던 때 직속상관인 3군단장은 송요찬 소장,부 사단장은 최재홍 대령, 참모장 장태명 대령, 정보참모 차규헌 중령, 군 수참모 윤필용 중령, 작전참모 이근섭 중령, 인사참모 조천성 중령이었 다.
육사 동기생이자 동향인인 김재규 대령은 연대장이었다. 박정희는 사 단장으로 부임하자말자 생면부지의 윤필용 대대장을 군수참모로 발탁했 는데 이것은 부대를 깨끗하게 운영하겠다는 선언적 행동이었다. 당시 사 단업무의 80%는 군수와 관련된 것이었고 부정이 개재될 소지도 넓었다. 윤필용은 곧 박정희 사단장이 '자상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임을 알게 된 다. 5사단에서도 여느 부대처럼 사단 지역내의 나무들을 잘라 후방에 내 다팔아 돈을 만들고 이를 장교들끼리 나눠가지는 이른바 '후생사업'을 하고 있었다.
정부에선 '산림도벌의 엄단'을 외치고 있었지만 현지 관청 에서는 박봉에 허덕이는 장교들의 사정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 고있었다. 다만 나무를 자를 때 그루터기를 남기지 말아달라고 사단장에 게 부탁했다. 박 사단장은 산비탈에 나무를 베고 남긴 밑둥치들이 많은 것을 보고 윤필용에게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현장을 시찰한 박정희는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지 않은 것을 알고는 재차 지시했다. 윤 중령은 이 두번째 지시도 잊어먹었다. 다시 그곳에 들른 박정희는 산비탈을 보지 않는 방향으로 일부러 등을 돌리더 니전혀 딴 화제를 끄집어냈다. 윤필용은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 되었다. 박정희 사단장은 통역장교인 한병기 중위를 전속부관으로 발탁 했다. 한병기는 '미래의 장인'이 워낙 엄격하게 보여 '이런 분을 어떻게 모시나'하고 고민했다. 더구나 한병기는 잠이 많은 청년이었다. 관사에 서 연락병과 함께 잤는데 꼭 그가 깨워야 일어났다. 어느 날 연락병이 흔들어 깨우는데 사단장이 '기다리시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저는 후다닥 일어나 군화 끈도 매는둥마는둥 머플러는 손에 들고 뛰어나가니 사단장께서 지프에 오르시지도 않고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의 자리가 뒷자리이기 때문에 제가 안 타면 사단장이 바 깥에서 기다리셔야 하는 거지요. 허겁지겁 타긴 탔는데 송구스러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뭐라고 나무라시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 분은 한마디도 안하셔요. 그런데 며칠 뒤 제가 또 늦잠을 자다가 똑 같은 실 수를 했습니다. 허둥대면서 차를 타니까 박 장군께서 딱 한 마디를 하십 디다. '임마, 누가 부관이야!''.
박정희는 상관들에게는 할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죽은 이용문의 친 구로서 박정희와도 자주 어울렸던 시인 구상은 이 무렵 3군단 지역을 방 문 했다. 영남일보 주필이던 그를 환영하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박정희 준장은 송요찬 군단장 등 네 명의 장성들과 함께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노래가 나왔다. 박정희는 일본의 한시를 읊었다.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를 보네.' 동석한 한 소장이 '그, 일본 것 되게 좋아하네' 라고 빈정댔다. 박정희는 이 상관의 시비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박 준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구상을 향해서 소 리쳤다.
'구형, 갑시다. 이런 속물들 하고는 술 못 마시겠어요.' '아니, 내 옆에 이런 미희들이 있는데 내 어찌 자리를 뜰 수 있겠소.'.
박정희는 휑하니 혼자 나가버렸다. 다음날 구상은 간밤의 일이 걱정 이 되어 박 사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송 장군한테 당하지 않았어요.'.
박정희는 대수롭지 않게 '아무 일 없었다'고 했다. 박정희의 오기도 오기지만 그런 것을 다 포용해주는 송요찬 군단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음 큰 딸 박재옥은 김종필-박영옥 부부와 함께 서울 제기동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육영수가 예고 없이 제기동 집에 나타났다.육영수 는 동덕여고에 다니고 있던 재옥을 데리러 온것이었다. 재옥이 처음 보 는 육영수는 '깔끔한 한복을 입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재옥은 두말 없 이 새 엄마를 따라나섰다. 속으로는 영옥이 언니가 섭섭하게 생각할 것 이라고 걱정했다.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었던 언니가 미련없이 떠나는 나를 보고는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를 맞고 살아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나중에는 계모든 서 모든, 아픈 어머니든 미친 어머니든 내겐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했다. 나 는 노량진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몇번이고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어 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자 고.>.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