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사단장
광주의 육군포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준장은 휴일에는 사냥을 즐겼다. 당번병 박환영, 운전병 이타관을 데리고 무등산 기슭이나 송정리 근처 야산을 다녔다. 하루에 꿩을 서너 마리 잡았는데 돌아 오다가 농민들을 만나면 나눠주곤 했다.
농민들이 농주를 대접하면 박 정희는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회식이나 야외 소풍 때는 부하 장교 들에게 부부 동반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부하들의 가정생활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부하들이 부정사건에 연루되면 처벌을 가볍게 하 여 재기의 기회를 주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 부하들의 가정 사정을 잘 파악하고 그런 부정을 저지르게 만든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병학교에서 박정희는 5·16거사 때의 주체세력 중 한 축을 이루는 포병 인맥과 인연을 갖게 된다. 행정처 보좌관 이낙선(상공부, 건설부 장관 역임), 항공대장 이원엽(소장 예편, 감사원장 역임), 학생대장 홍종철 (대통령 경호실장, 문공부 장관 역임), 부교장 정인완(준장, 최고회의 비서실장 역임), 교관 구자춘(서울시장, 내무장관 역임)이 박정희 교장 의 인격에 감복하여 '혁명동지'가 된 사람들이다. 홍종철 중령의 동서 도 장교였다. 육영수는 장교를 남편으로 둔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 가는 것이 부러워 동생 예수를 장교한테 중매하려고 애썼으나 어머니 이경령이 '군인 사위 하나로 족하다'고 말렸다.
박정희가 광주 포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가슴에 새겨 둔 사건이 하나있었다. 미국과 석유, 그리고 자주라는 단어를 화두로 제공한 사건 이었다. 그때 주한미군은 한국군과 민간 부문에 대한 석유공급권을 독 점하고 있었다. 미군은 기름을 들여와 코스코란 회사를 통해서 민간부 문에 기름을 팔았다. 1954년 이승만 정부와 주한미군은 환율문제로 갈 등을 빚고 있었다. 당시 공식 환율은 1달러 대 1백80환이었다. 미군은 이를 1 대 2백54로 올려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에 한화를 대여하고 있었다. 미군은 환율이 오른 다음에 이 돈을 갚으면 득이 있기 때문에 한화 상환기일이 지났는데도 갚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일 미군에 대한 한화대여를 중단했다. 미군은 외출할 때 가지고 나갈 한화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주한미 군은 코스코를 통한 민수용 기름 판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군납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우리 경제의 군납에 대한 의존도를 감안 하면 이것은 일종의 무역금지 조치였다. 미군은 한술 더 떠서 코스코를 거치지 않고 미군이 직접 기름을 내다팔겠다고 위협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오일 쇼크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단유 20일째, 신문 사회면에는 '3백여 공장 문닫아, 서울시내 버스 운행 마비상태'란 아우성이 실리더니 한 달이 지나자 정부는 전시가 아 닌데도 전시생활 강조기간을 선포, 내핍생활을 촉구했다. 11월초 기름 부족으로 인한 버스 운행 중단 비율은 서울 70%, 경남 75%, 경기 50%, 경북 1백%였다. 어선들은 기름을 구하지 못해 출어를 중단했다. 부산어 시장에 위탁판매되던 생선이 4분의 1로 줄었다. 부산항엔 오도가도 못 한 선박 2백여 척이 묶여 있었고 목포에선 집배원이 버스를 탈 수 없어 우편배달이 전면 중단되었다. 고집 센 이승만 정부도 기름의 힘 앞에서 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미군측의 환율 인상 요구를 들어주었다.
박정희는 이 단유소동을 지켜보면서 석유자급 없이는 국가의 자주와 독립 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5·16거사 뒤 박정희가 가장 먼저 착 수한 것이 민족자본에 의한 정유회사 설립이었다. 정유회사 설립은 젊은 장교들에게 민족주의적 열정의 한 상징이자 염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상징물인 울산정유공장이 민족자본의 부족으로 결국은 미국계 석유 회사걸프와 합작하게 되는 과정은 자력갱생 노선에서 개방정책으로의 전환과 궤를 같이 한다.
1955년 박정희는 강원도 양구에 있던 5사단장으로 옮겼다. 박정희가 처음으로 전투부대의 지휘관이 된 것은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이 풀렸다는 뜻이다. 장도영 장군은 자신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자리가 비는 5사단장에 박정희 준장을 추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정희의 사 단장 취임을 막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김창룡 육군특무부대장도 이 즈음에는 박정희의 전력 문제가 나오면 '그런 사람이 아니야요'라고 변 호해주었다. 정작 박정희는 교장 선생님 자리를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쉽 게 생각하더라고 한다. 교육처장 오정석(준장 예편) 중령은 이렇게 회 고했다.
'그 분은 정말 훌륭한 교육자였습니다. 그 분 스스로도 학교장이란 직책에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도 영전 이어서 기뻐해야 할 텐데 '한 일년만 더 했으면…' 하면서 섭섭해 하더 군요.'.
넓은 관사에서 편하게 살았던 육영수와 근혜, 근영, 육예수, 그리고 이경령, 이 다섯 식구에게는 다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광주에서 서울 로 이사할 때 가족은 일단 옥천으로 가고 당번병 박환영과 운전병 이타 관이 이삿짐을 기차에 싣고 청량리역에 내렸다. 수화물 창고에 짐을 넣 어놓고 누군가가 데리고 오기를 기다리는데 1주일이나 소식이 없었다. 두사람이 의논하여 이타관은 짐을 지키고 박환영은 양구로 가서 박정희 사단장을 만났다. 박정희는 매정하게 말했다.
'다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뭘 했나.'.
박환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사단 헌병부장이 나서서 노량진 역전에 서 부엌도 없는 문간방 두 개를 구해주었다. 두 졸병이 이사를 하는 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단장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부하들을 보내 줄 텐데 박정희는 이런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결벽증이 있었다. 박환영 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짐을 나르다 지쳐 퍼져 앉아 우리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여 느 사단장 같으면 부하들이 몰려 나와 단숨에 해치워버릴 일을 두 사람 이 하느라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사를 끝낸 뒤 허기가 져서 둘은 앓아누워버렸어요.'.
이타관은 '솥을 걸 데가 없어 풍로를 사다가 냄비로 음식을 끓였다' 면서 '사단장님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집이 좁아 들여 놓지못한 짐은 청량리 부근에 살던 김종필 중령 집 처마 밑에갖다 놓았 다. 두 사람은 판자와 거적을 덮어 부엌을 만들었다. 그런 뒤 옥천으로 연락을 해서 육영수와 가족들이 올라오도록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