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학생'
조규동 소위가 사단장실에 들어가니 박정희는 부사단장 최재홍 대령에게 '자리를 좀 비켜주세요'라고 했다. 일대일 대면이 되자 박정희 준장은 조규동 소위에게 경어를 써가면서 타일렀다.
'임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오. 그런 선거를 나도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오. 군단장이 시키고 하니 나도 어찌할 수 없었던 거요. 만약 임자도 연대장이었으면 그런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을 거요. 청년장교로서의 정의감을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수술이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섣불리 건드리면 도집니다. 지금 수술하면 희생만 큽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 니다.'.
조규동 소위는 지금도 '그 분이 말씀을 참 어질게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로써 조 소위의 양심선언 사건은 처벌없이 끝났다. 그러나 인사기 록엔 이 사건이 실렸다. 나중에 조규동 소령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화랑무 공훈장도 받았으나 중령 진급에 누락되어 전역하게 된다.
1956년 5월에 있었던 부정선거와 잇따른 부하들의 월북과 양심선언 사 건은 박정희 사단장의 마음 속에 하나의 결심을 심어준다. '난들 어쩌란 말인가'란 자조가 보름 사이 '나라가 곪을대로 곪도록 내버려둔 다음 수술 을 해야 희생이 덜하다'는 냉철한 계산으로 바뀐 것이다. 박정희는 권력을 잡아야 이 모순덩어리의 상황을 뒤집어놓을 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 다. 이때 이후 박정희의 태도가 달라진다. '내 사람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서울 집에 들르고 있었다. 노량진 셋방 에는 방이 두 개뿐이라 운전병 이타관은 바깥에 세워 둔 지프 안에서 잠을 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추워 부엌 아궁이 옆에서 육영수와 함께 불을 때면서 몸을 녹였다. 박정희가 '내 집'을 마련한 것은 1956년4월이었다.서 울 충현동의 낡은 2층 일본식 집을 샀다. 연건평이 약 30평. 지금 장충체 육관 근처에 있었던 이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은행에서 융자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2층의 방 하나는 월세를 끼고 산 것이었다. 이 방에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가끔 들르는 미국인의 현지처로 보였 다. 집 옆에는 높은 축대가 있어 낮에도 어두웠고 홍수가 나면 하수가 역 류하여 마당이 물바다가 되곤 했다.
육영수는 가끔 인제군의 사단사령부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차와 과 일로써 장교들을 대접하곤 했다. 육영수는 젊은 장교들에게 '다른 사단장 들 집에는 차가 다 있는데 저 영감에게 차 한 대 달라고 해도 안 주세요' 라고 남편 흉을 보듯 농담하다가도 금방 '그래도 저 분이 인정은 참 많아 요'라고말을 돌렸다. 끝에 가선 항상 남편 칭찬이었다. 밤이 되면 육영수 는 보온병에 커피를 넣어 사단장 숙소 주변에 있는 초소를 찾아갔다. 박정 희 사단장은 사정과 공무를 좀처럼 혼동하지 않았다. 통신중대 부중대장이 었던 고찬국 당시 중위는 '사단장의 내무사열이 가장 무서웠다'고 기억한 다.
'사단장은 통신참모 심 중령을 총애했습니다. 심 중령은 그분의 바둑 상대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통신중대의 내무 사열에 대해서 안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무사열이 시작되자 사단장 은 통신 참모가 타고 다니던 지프부터 검열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도크 위로 올려놓게 한 뒤 지휘봉을 든 그 분이 자동차 아래로 들어가더니 손가 락으로 쓰윽 문질러보고는 '재검열!'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설마 자동차의 밑까지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모든 장교들이 차를 한 대씩 맡아 밤을 새워 가면서 윤이 반들반들 나도록 닦았습니다. 우리는 '일본 육사 출신이 무섭기는 무섭구나'라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1956년 7월15일 박정희는 5사단장직에서 해임되고 진해 육군대학교 입 교를 명령받았다. 장군이 학생이 된 것은 박정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5사단 장교들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사단장의 비협조와 장교의 월북사 고, 그리고 조규동 소위의 양심선언이 박정희의 좌천성 인사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진해 여좌동에 있는 집의 방 두 칸을 빌렸다. 육군대 학 총장 관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집이었다. 박 준장이 한 방을 썼고 당번병 박환영과 이타관 운전병이 다른 방을 썼다. 식사는 함안이 고향인 할머니가 식모로 들어와 해주었다. 육영수는 양식이 떨어지면 내려와 열흘 쯤 머물다가 가곤 했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생애에서 그런 진해생활은 가장 '오붓했던' 시절로 기록될 것이다. 박 준장은 교육을 끝내면 일찍 집 으로 돌아왔다. 여름 해는 길었다. 해질 때까지의 시간을 이용하여 내외 가 해안을 따라 걷기도 하고 언덕에 올라가 장엄한 낙조를 구경하기도 했 다. 밤에는 교재를 뒤적이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육영수에게는 싱싱한 생선을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짧은 시간 박정희를 따라와 있었던 전속부관 한병기 중위에 따르면 박 준장은 여기서도 가끔 쌀이 떨어지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는 준장 월급 으로도 생계유지가 곤란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부러 장교들의 처우를 나쁘게 해놓고는 군대를 통제하려고 한다'고 분노하고 있 었다. 모든 장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놓으면 특무대가 누구든지 잡 아 넣을 수 있으므로 군대에 대한 감시가 쉬워진다는 풀이였다.
6·25 후 이승만은 상이군인들을 구호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방치하여 이들이 생존 을 위한 구걸과 강요를 하도록 만들었다. 김일성이 전사자 가족을 우대한 것과는 판이한 이승만의 이 실책은 많은 국군장교들을 반 이승만 정서로 돌려놓았다. 어느 날 박정희는 한병기 중위에게 편지를 써주더니 광주 1관 구 사령부의 김재춘 참모장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김 대령은 편지를 뜯어 보고는 쌀 다섯 가마를 구해 주었다.
한 중위는 기차 편으로 여수까지 쌀을 싣고 갔으나 헌병의 검문에 걸릴 까 두려운 나머지 5만 환을 받고 팔았다. 진해로 돌아와 이 돈을 내어놓으 니 박정희는 일단 받아두었다가 한 중위가 서울로 돌아갈 때 2만환을 떼주 었다.
박정희는 한 중위가 무료하게 지내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내일부터는 도시락을 싸줄 테니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이나 하고 오라'고 했다. 며칠 뒤 한 중위는 이형근 참모총장의 측근에게 부탁, 육본 보임과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손을 쓴 뒤 박정희의 허락을 받았다. 쾌히 승낙한 박정희는 '서 울에 가면 우리 집에 빈 방이 있으니 거기서 출퇴근하라'고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