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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사참모장
 1군사참모장
 
 박정희 소장의 7사단은 설악산 일대를 관할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대청봉 능선에서 8연대가 예비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예비진지란 제1선이 붕괴되었을 때에 대비한 제2선의 참호와 교통호였다.
 
 박정희는 어느날 아침회의를 하다가 8연대장이 이 진지공사 현장에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 았다고하자 화를 내더니 같이 가 보자고 일어섰다. 박정희는 '스페어 깡' 이라 불리던 20리터 들이 야전 철통 20개에다가 막걸리를 담아 들고 오게 했다. 사단장과 참모들은 설악산 등산을 시작했다. 정상 바로 아래서 반 달곰을 발견하여 사살했다. 박정희는 곰고기를 삶아먹도록 했는데 비릿한 맛이었다고 한다.
 
 해발 1천m를 훨씬 넘는 고지에서 참호공사를 하던 병사들은 사단장이 갖고 온 막걸리와 곰고기를 포식했다. 진지 공사를 지휘하던 대대장이 박 정희에게 보고했다.
 
 '제가 전쟁 때 이곳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후 퇴를 하는데 부하 사병 한 사람이 호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을 수습하지 못 했습니다. 비옷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돌로 호를 채운 뒤 표시를 해두고 물러났는데 이번에 이 공사를 하러 와서 유골을 찾았습니다.'.
 
 '그것 잘 됐다. 좀 기다려 봐.'.
 
 박정희는 마치 지관처럼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곳에 매장하자'고 했 다. 즉석에서 묘를 파고 유골을 옮겨묻었다. 그리고 원목을 깎아 비목을 세웠다. 그리고는 막걸리를 붓고 위령제를 지냈다. 며칠 뒤 8연대 방첩대 파견대장 이동걸 소령이 사단장 숙소에 들렀더니 박정희는 마분지 위에 무엇을 놓고 태우고 있었다. 이 소령이 '그게 뭡니까'라고 묻자 박정희는 씩 웃으면서 '웅담을 말리는 중이야'라고 했다. 이동걸 소령은 '사단장이 별것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첩대 장교의 눈에비친 박정희는 약점 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휘관들이 부패하면 방첩대 장교들의 눈치를 보면 서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게 없으니까 오히려 방첩대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청해야 했다. 박정희는 폭음을 하고 있었다. 술자리 에서 업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았 다. 어느 날 박정희는 이동걸에게 '어이, 자네가 남자해라. 내가 여자할 게'라고 하더니 작부의 치마를 벗겨 자신이 입고는 이동걸을 데리고 마루 로 나와선 마루판이 꺼질 정도로 뛰고 춤추고 했다.
 
 방첩대가 관리하고 있던 박정희의 신상기록표엔 좌익전력이 적혀 있긴 했지만 방첩대에선 그 런 면에선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동걸은 '박 사단장은 파렴 치범은 가차없이 군법회의에 넘겼지만 업무상 잘못을 저지른 부하들은 과 감하게 용서했다. 그 구분이 철저했다'고 기억한다.
 
 1958년 6월17일 박정희 소장은 1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원주 로 부임했다. 그 전해 1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송요찬 중장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송요찬은 대외적인 활동에 바빠 야전군의 안살림을 박정희에 게 맡기다시피했다. 치밀한 박정희와 호탕한 송요찬은 서로 잘 맞았다.박 정희로서는 야전군의 사단장들 및 참모들과 업무적으로 친해져 자연스럽 게 인맥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었다. 박정희 참모장 아래를 거쳐간 참모진 은 인사 박경원(육군소장 예편), 작전 최택원(총무처 차관 역임), 작전 채명신(주월한국군사령관 역임), 정보 김용순(중앙정보부장 역임) 등이었 다. 모두 5·16거사 때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중용되었다.
 
 송요찬-박정희 콤비는 이 때 국군역사상 가장 큰 개혁 중의 하나를 했다.
 
 즉 후생사업을 중단시킨 것이다. 군대 차량을 민간인에게 대여해주어 돈을 받고 이 돈으로 월급이 적은 장교들을 도와준다는 취지로 한국전 때 부터 묵인되었던 후생사업을 1군에서부터 없애자 곧 전군으로 파급되었다. 이 후생사업으로 많은 장교들은 부패, 치부하고 정치권과 언론한테는 약 점이 되었다. 이런 구조적 부패요인을 뜯어고치자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 다. 작전참모 채명신 준장은 이렇게 적었다(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후생사업으로 군 내의 갈등이나 상하간의 불신은 말이 아니었다. 돈 욕심이 많은 지휘관이 있는 부대는 특히 심했다. 송요찬 사령관은 말했다. '후생사업으로 인해 전쟁에 써야 할 차량이 폐차로 변해가는데 이러다가 정말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니 어렵지만 후생사업을 중지 합시다.' 정말 당시로선 대단한 결심이었지만 우려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렵습니다. 그간 부대운영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는데. 게다가 권력기관 이나 육본, 국방부와도 마찰을 부를 우려가 있습니다.' 박정희 참모장과 나는 '지금 하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면서 송 장군의 방침을 지 지했다. 결국 우리는 갑론을박 끝에 후생사업과 단절할 것을 결심했다.> 송요찬은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앞으로 30일 이내에 민간인들에게 대여해준 모든 차량을 원대복귀시 킨 다음 정비를 마치고 지휘검열을 받을 준비를 하라!'.
 
 송요찬은 이어서 1군 전 부대에 대한 모포실사를 했다. 그때까지 장 부상으로는 사병 1인당 여섯 장이 지급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실사를 해 보니 1인당 한 장꼴도 되지 않았다. 수십만 장의 모포가 없어진 셈인데 그래놓고도 미군에 대해서 추가적인 모포지급을 요청해야 했다. 송요찬은 이어서 부대의 난방, 취사용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어나갔다. 군 부대가 있는 곳에 숲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해서 '송충이'란 별명까지 얻 게 했고 벌목 때문에 지휘관들이 기자들의 밥이 되도록 했던 시대를 마감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 황지를 중심지로 한 석탄증산 붐 덕분이었다.
 
 휴전 후 우리 군대는 막사건설, 진지 구축, 전술도로 공사에 열중했 다. 외부에서 자재를 지원받지 않고 거의 자력으로 이런 건설공사를 하자 니 나무가 남아나질 않았다. 금화 남쪽 사창리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에 근무했던 이건영(12·12사건 때 3군 사령관) 당시 중령은 이렇게 썼다(회 고록 '패자의 승리').
 
 <스리쿼터의 차바퀴를 빼고 긴 피댓줄을 걸어 톱을 설치, 산골짜기에 놓고 제재를 했다. 야전삽에 날을 세우고 곡괭이는 끌, 도끼, 까뀌등 훌 륭한 건축 공구가 되어 돌을 깎고 모나게 하는 데 쓰였다. 삽과 곡괭이는 너무 써서 원형마저 잃을 정도였다. 철조망을 잘라서 못을 만들어 썼다. 막사를 짓고 도배는 건빵봉지와 피우고 난 빈 담뱃갑으로 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위대한 생존력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무에서 유를 만드는 능 력'은 1950년대의 군대에서부터 단련되고 있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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