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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가장
 무책임한 가장
 
 7사단장 시절 박정희 준장의 법무참모는 박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신직수 중령이었다. 군법회의는 양곡관리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군법회의의 선고는 지휘관이 그 형량을 확인해야 발효된다. 7사단장 박정희는 한달이 지나도록 결재를 미루었다. 하루는 참모들과 만나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고민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이 중령이 빼먹었다는 양곡 4백 가마의 내역을 보니까 저 혼자 먹은 것은 얼마 안되더군. 거의 다 뜯기고 상관들에게 바친 것이야. 아마 도 내가 그동안 부대에서 가져다 쓴 양곡도 다 합치면 꽤 될 거야. 그런 이 중령을 감옥에 보내자니 가슴이 맺히는군.'.
 
 군수참모 윤필용 중령이 '각하의 고민을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선처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중령이 집을 팔든지 하여 변상시키고 파면만 시키는 것이 어떨까?'.
 
 윤필용에 따르면 당시 양곡을 부대에서 떼먹는 일은 구조화되어 있었 다고 한다.
 
 '그때 장교들 월급으로는 담뱃값도 못댈 정도였습니다. 장병 급식용 양곡에서 쌀을 빼내가는 관행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쌀가마가 여 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축이 나 막상 사병에게 전달될 때는 쌀 가마 니를 한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단장들은 '눈감아 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재수없이 발각되면 난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지요. 박 사단장은 이 문제를 양성 화했습니다. 쌀 한 가마에 2㎏씩 떼내도록 했습니다. 1㎏은 사단 운영비 나 장교들에 대한 생활보조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병참부장에게 모아주어 결손이 난 양곡을 보충하도록 했습니다.'.
 
 1958년 3월 박정희 7사단장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때도 '생명의 은 인'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이 있었다. 경무대로 올라간 소장 진급자 명단을 본 곽영주 경무관(대통령 경호실장격)이 백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박정희 장군의 신원조회에 좌익활동 경력이 나타났습니다.'.
 
 백 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박 장군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합니다.'.
 
 박정희는 숙군에 걸려 1년 남짓한 공백이 생겼지만 육사2기생 가운데 는 가장 먼저 소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 장도영, 송요찬 같은 군 수뇌 부 인사들이 그의 인간됨을 이해하고 덮어주고 끌어주었기 때문이다. 박 정희는 사람을 대할 때 좋고 나쁘고가 너무 분명한 면이 있었다. 당시 직속상관은 오덕준 3군단장이었는데 박정희는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 다. 어느 날 오덕준이 전속부관 한병기 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나거기로 갈테니 사단장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해줘!'라고 했다. 박 정희는 '나 없다고 해!'라고 했다. 한 대위가 다시 군단으로 전화를 걸 었더니 군단장은 출발한 뒤였다. 박정희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면서 내 뱉었다.
 
 '참모장 보고 접대하라고 해!'.
 
 7사단에 대한 국정감사가 있을 때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어물쩍 넘 어가려고 하고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사단장을 상대로 꼬치꼬치 따졌 다. 감사가 끝난 뒤 부하들을 모아놓고 박정희는 자유당 의원들을 거명 하면서 '저것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경멸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참 모장더러 자유당 의원들을 접대하라고 시키고 자신은 이철승 등 야당의 원들을 모시고 나가 접대했다. 그 뒤로도 박정희는 이철승 의원을 좋아 했고 이 의원도 박정희를 높게 평가했다.
 
 1958년의 4대 총선 때 청년 정치인 김대중은 7사단이 있는 인제선거 구에 민주당 후보로 등록하려고 했으나 관권의 방해를 받아 무소속후보 로 출마하여 자유당 후보와 맞섰다.
 
 <이때 우연히도 인제에 박 대통령이 7사단장으로 주재하고 있었다. 당 시 그와 부정선거와는 관계가 없던 것이지만 나는 정부와 여당의 소행이 너무나도 괘씸해서 이같은 실상을 그에게 호소해보려고 군청에서 20m쯤 떨어진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박 사단장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 지만….>.
 
 그 뒤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의 1대1 대면은 한번도 없었다.
 
 1958년 5월 박정희는 서울의 충현동에서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대지 1백평, 건평 30평쯤 되는 일본식 단층집이었다. 이 집을 사는 데 든 4백 50만환을 만드는 데는 7사단의 연대장들과 포병단장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사단장 정보비가 나오면 참모들에게 나누어 주어버렸다. 가정의 생계에 대해서는 무책임할 정도로 무관심하였다. 참모 중 한 사 람이 독일산 사냥개 와이마르너 암컷을 육영수에게 주었다. 육영수는 이 개를 키워 새끼를 낳으면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비에 보탰다. 윤필용 중 령이 '저 개가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주세요'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았 는데도 다 팔아버리더라고 한다.
 
 7사단장 시절에도 육영수는 한달에 한번꼴로 인제로 와서 남편과 함 께 있다가 가곤 했다. 부부싸움을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박 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이었다. 7사단의 어느 장교 아내가 육영수에게 그 동안 있었던 사단장의 여성편력을 고자질하곤 했다. 어느날 그 장교집에 서 집들이 회식이 있었다. 윤필용 중령이 사단장을 모시러 갔다. 박정희 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안 가겠어. 그 여편네는 이상한 여자 아냐? 자기 남편 감시나 잘 하지 왜 남의 남편을 감독해!'.
 
 1958년 10월3일 박정희와 첫 부인 김호남 사이의 첫 딸 박재옥이 전 속부관 한병기 대위와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 동원예식장에서 있었던 결 혼식에서 주례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따랐던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다. 박정희는 이 날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것 같았고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박재옥의 기억). 박재옥은 이부자리 한 채와 백금반지 하나가 혼수의 전부였다고 기억한다. 결혼식 의상도 따로 짓지 않고 한복으로 때웠다. 한병기는 반지도 구리로 하자고 했다. 보석으로 만들면 팔아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이것만은 박재옥이 반대했다. 신혼부부는 경주로 여행을 갔다. 박재옥은 어머니가 경주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기 때문에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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