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제 7부 가난한 군인의 길 : 썩은 고목 같은 것이…
 썩은 고목 같은 것이…
 
 1959년 1월에 공식적으로 발족한 이후락 소장의 중앙정보부가 처음에 한 일은 미 CIA가 넘겨주는 방대한 양의 정보문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정보부는 자료실을 설치, 공산권의 국가별 정보분류를 시작했다.
 
 CIA가 제공한 공산권 정보를 정리하여 이후락의 정보부는 매일 국방부장관 비서실장에게 보고하고 비서실장은 일주일에 한번 씩 이를 요약하여 김정렬 장관에게 보고하는 체계를 세웠다. 정보부 는 북한측 정보를 정리하여 CIA측에 넘겨주곤 했는데 우리의 대북 정보망이 허약하여 줄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를 '79호실'이란 암호명으로 부르자고 김 장 관에게 제의했다. 김 장관은 이를 허락한 뒤에야 79라는 숫자가 이 후락의 군번인 10079에서 딴 것임을 알게 되었다. 1958년 라오스에 서 콩레대위가 이끄는 좌익 쿠데타가 일어나 내전에 돌입했다. 이승 만 대통령은 라오스에 국군을 파병하여 우익정권을 돕는 방안을 검 토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
 
 이후락 소장은 극비리에 라오스에 잠입하여 우익 지도자 노사반 장군을 만나고 왔다. 김정렬 장관이 이후락을 데리고 이승만 대통령 한테 보고했다.
 
 이후락은 '노 노 노 노사반 장군이…'라고 더듬거려 김정렬이 진 땀을 빼면서 도와주었다. 라오스 파병은 구상 단계에서 더 진전되지 않았다. 김정렬 장관은 또 국무회의 때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이후 락으로 하여금 국제정세, 특히 동구권 정세를 보고하도록 했다. 박 정희 정권의 3대 인물 박정희, 이후락, 김종필, 세 사람은 정보장교 였다는 공통점이 있고 국가 운영에서 정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체 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1959년 7월1일 박정희는 서울지역을 관할하는 6관구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사이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이 해 겨울 박정희는 또 불을 냈다. 영등포의 사령부 건물내 교육과장 (과장 이낙선) 사무실에서 난로과열로 불이 나 사령관실, 참모장실, 고문관실, 작전정보처 사무실을 모두 태웠다. 기밀서류는 건졌다.팔 짱을 끼고 불구경을 하던 박정희 소장은 관할 경찰서장이 옆에 와서 화인을 꼬치꼬치 묻자 신경질을 내면서 일격을 가해 벌렁 나자빠지 게 만들었다. 안면이 넓고수완이 좋은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뛰어다 녀 이 화재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서울을 위수지역으로 하고 있던 제6관구의 사령관은 상당히 정치 적인 자리였다. 국회의원들과 권력층의 청탁이 많이 들어왔고 언론 과 접촉하는 기회도 많았다. 박정희는 이런 대외적인 일들을 김재춘 참모장에게 주로 맡겼다. 그런 박정희도 부대내에서 어려운 문제가 터지면 정치권에 부탁을 했다. 당시 대구출신 신도환 의원은 자유당 의 젊은 실세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의 총애를 받아 반공청년단 단장, 대한체육회장 서리로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묵고 있던 명동 사보이 호텔의 접수대에서 그의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소장이 찾아 왔다는 것이었다. 신도환은 최홍희 장군이 또 태권도 협회의 분규 타결 방안을 의논하려 온 것으로 생각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들어오시오'라고 해도 가만히 있어 신 의원이 문을 열었다. 작은 키에 깡마른 소장이 서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박정희는 방으로 들어와서 '6관구 사령관 박정희'라고 인사를 하 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대에서 영관급 장교들이 부정사건 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는데 그 사건은 자신과는 무관하니 선처해달라 는 취지였다. 신도환은 기분이 나빴다. 태도도 당돌할 뿐 아니라 부 하의 잘못을 상관이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서 살 길을 찾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자신은 대구가 제2의 고향이라 대구 출신인 신 의원을 찾아왔다고 했다. 신도환 의원은 듣기 싫은 말을 해주고 박정희를 돌려보냈다.
 
 그 뒤 신도환은 대구에 있는 2군 사령 관 최영희 중장에게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최 중장은 '아주 청렴한 군인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도환은 그 뒤 군 수뇌부 인사를 만나면 최영희 장군의 인물평을 전해주면서 박정 희를 두둔했다고 한다. 신도환은 4·19 뒤 고대생 습격사건으로 구 속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5·16 뒤 소급 입법으로 신설된 혁명재판소에 의해서 법정구속되어 20년형을 선고 받고 8년10개월을 복역했다.
 
 1959년 가을 박정희는 자유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여러 장성들 과 함께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 장성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뒤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 국회의장 집 에도 찾아갔다고 한다(이낙선 증언). 대만시찰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이런 불평을 했다.
 
 '경무대엔 군 통수권자가 계신 곳이니 응당 가서 인사를 올려야 겠지만 서대문엔 뭣하러 안내한단 말이야. 국회의장이 군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썩은 고목 같은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팔팔한 새 나무를 심어도 꽃이 필까말까하는 땅인데….'.
 
 참모들이 '각하, 그만하십시오'라고 말리자 박정희는 내뱉듯이 말했다.
 
 '내가 군복을 벗으면 될 것 아니야.'.
 
 이 무렵, 즉 1960년 1월호 사상계(월간잡지)에 장교들을 자극하 는 논문이 한편 실렸다. 미 상원외교분과위원회가 콜론 연구소(Colon Associates Institution)에 의뢰하여 작성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이란 제하의 논문이었다. 장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은 부분이 있었 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의 예대로 군사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 현재 한국군에 는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이 없다. 육군엔 야심가는 많이 있으나 지금까지 육군은 정부의 주인이 아니라 그 도구에 불과 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유당 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조종 기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정적이 될 만한 사람은 실각당했고 강력한 독립성을 가진 지휘관은 냉대받았다. 만일 정부가 완전히 실패하게 되면 언젠가 한번은 군부지배가 출현하리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없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