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지부 개설과 이후락의 등장
누군가는 해야 했던 군대의 구조적 문제점을 개혁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송요찬 1군사령관에게 모략이 쏟아졌다. 국회에서도 감사 반을 보냈다. 개혁에 대한 이런 반발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참모진이 똘똘 뭉쳐 외부 압력에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송요찬은 별명이 '석두'였다. 그러나 그는 아래 사람의 직 언과 발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었다. 그는 부하인 박정 희 참모장을 어렵게 대했다. 한번은 헌병부장이 참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송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차량관리책임자를 군법회의에 넘긴 적이 있었다. 이런 월권을 참을 사람이 아닌 박정희는 헌병부장을 불러 재 떨이를 날린 다음 송요찬을 찾아갔다.
'각하, 시정을 해주시든지 저의 사표를 받으십시오.'.
송요찬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워낙 결재를 많이 하다가보니 그것이 그냥 묻어넘어간 모양 이구려.'.
송요찬 장군이 깐깐한 박정희 참모장을 휘어잡는 방법이 있었다.그 는 술고래였다. 정평이 난 박정희의 주량도 송요찬에 비할 바가 못되 었다. 부하 30여명을 상대로 독주로 대작을 한 다음날 아침에 송요찬 은 칼날처럼 정시에 출근했다.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놓고결근한 자리 가 많을수록 그는 '다 안나왔나?'라고 하면서 기분 좋아했다.
그때마다 '여기 작전참모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채명신 준장 이었다.
채준장은 술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열외였던 것이다.박정희도 송장군과 마신 뒤엔 늦게 출근하곤 했다.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부터 총애해온 윤필용 중령을 1군 참모장보 좌관으로 데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윤 중령을 불러 조용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기밀비에서 5만 환을 떼어서 채명신 방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건 네주되 나는 전방 시찰중이라고 전해.'.
그날 저녁 박정희 소장은 윤필용에게 이런 사연을 털어놓았다.
'숙군 시절에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아까 그 친구가 나를 신문한 헌병이었어. 내가 육사 중대장으로서 가르친 5기생이지. 나는 조사받지 않을 때는 취조실 문쪽 바닥에 늘 꿇어앉아 있곤 했어. 아까 그 친구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꿇어 앉아 있어 복도에서 보이지 않으니까 '박정희 그 새끼 어디 있어!'하고 호 통을 치곤 했지. 그사람이 군복을 벗었는데 채명신이한테 돈을 얻어러 온거야. 내가 직접 전해주자니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아 자네를 시킨 걸세.'.
1군 참모장 박정희 소장의 당번병 박환영 하사는 제대를 하게 되었 다. 박정희에게 전역인사를 하러 갔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환영아, 5급 공무원 정도의 월급을 받도록 해줄테니 나하고 같이 있자.'.
박환영은 인간차별을 하지 않고 식구처럼 대해 주었던 박정희의 권 유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운전병 이타관 하사도 일단 제대했다가 박 정희의 권유를 받고 재입대했다. 두 사람 모두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모시게 된다.
1959년 2월 송요찬 1군사령관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하고 유재 흥 연합참모본부 의장이 그의 후임이 되었다. 유 중장은박정희 참모장 등 부하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이 훈시 가운데 '우리는 김씨의 군대도, 박씨의 군대도 아닌 국민의 군대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 며칠 뒤 경무대에서 '불충한 발언이다'는 힐문이 내려왔다. 유재흥 사 령관은 부사령관으로는 민기식 소장을 데리고 갔는데 이번엔 자유당의 실력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쪽에서 반발했다. 민 장군이 선거 때 자유당 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군 상층부는 이미 정치바 람을 크게 타고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은 공군 참모총장 출신인 김정렬 이었다. 하루는 웨 인 넬슨이라는 미국인이 김 장관을 찾아왔다. 미국 중앙정보부, 즉 CIA 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넬슨은 CIA서울지부를 창설하러 왔다고 말하 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김 장관에게 넬슨은 전임 장관인 김용 우와 CIA부장 앨런 덜레스가 함께 서명한 협약서를 제시했다.
한미 두 나라의 정보협력에 대해서 규정한 문서였는데 김정렬은 이런 것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넬슨은 이 협약에 따라 CIA지부를 개설하고 이 기구와 상대할 한국측 정보기관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CIA는 못된 놈들이야. 조심해!'.
6·25동란중 CIA는 진해 근방의 한 섬을 차지하여 특수부대를 훈련 시키고 있었다. 이승만이 낚싯배를 타고 이 섬을 지나가자 미처 통보 를 받지 못한 특수부대원이 발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다친 사람은 없 었지만 화가 난 대통령은 CIA요원들을 추방시켜버렸다.
넬슨은 CIA요 원들에게 외교관 특권을 제공해주고 자신들을 주한 미군이나 미대사관 과는 다른 별도의 독립된 존재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 김정렬은 CIA 지부를 미대사관 안에 설치하고 요원들도 형식상 대사관 직원으로 등 록하면 외교관 특권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넬슨은 독 립기관 대우를 계속 요구하다가 결국은 '대사관내 설치'로 낙착되었다. 이 이후 CIA지부는 대사관의 한 부서로 위장하고 지부장은 대사의 특 별보좌관이란 대외직명을 갖게 되었다.
김정렬 장관은 CIA와 상대할 우리쪽 정보기관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이후락 소장을 발탁하게 되었다. 이후락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고 박 정희 소령이 군내 남로당 수사에 걸려 군복을 벗었을 때는 그의 뒤를 이어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때는 주미대 사관에서 무관으로 3년간 근무하고 귀국하여 일정한 직책을 받지 못하 고 있었다. 이후락은 군내에서는 유재흥 장군 계열로 알려져 있었다. 유재흥 중장이 교육총본부를 창설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을 때는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김정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락은 미국 근무에서 귀국한 뒤 유재흥을 찾아가 보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유재흥은 김정렬 장관을 찾아와 이후락을 써달라고 간청했다. 김정렬 장관은 그를 CIA 한국지부장의 상대역으로 삼기로 했다. 우선 국방장관 직속으로 '중앙 정보부'를 창설하고 이후락을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 인원은 육-해-공 군에서 뽑은 40명의 장교와 사병들로 구성하고 남산에 있던 연합참모 본부건물에 사무실을 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