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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시절 제자… 패기 만만한 도미파
 육사시절 제자… 패기 만만한 도미파
 
 박정희 군수기지 사령관 아래의 참모진은 참모장 황필주-김용순 준장, 인사참모 박태준 대령, 작전참모 김경옥 대령, 헌병부장 김시진 대령, 비서실장 윤필용 중령, 공보실장 이낙선 소령 등이었다. 모두 그 전에 박정 희와 함께 근무했거나 육사시절 제자였던 '박정희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5·16 뒤에도 박정희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하게 된다. 육사 6기 출신인 박태준(현 자민련 총재) 대령은 육본 보임과장이란 요직에 있다가 박정희에 의해서 발탁되었다.
 
 '어느 날 내 방에 오시더니 어깨를 툭 치셔요. '어쩐 일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내정되었는데 함께 내려가자'는 거였습니 다. 그러시면서 사령부 창설에 따른 참모진 및 요원 편성을 해보라고 했 어요.'.
 
 박 대령은 25사단에서 연대장, 참모장을 지낼 때도 몇 차례 당시 1군 참모장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었다. 박정희가 본부사령직을 제의하기에 '그건 밥장사 아닙니까'하면서 거절한 적도 있 었다. 자민련 박태준 총재는 박정희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육사에서 생도교육을 받을 때 그 분은 중대장으로서 포병술을 강의했습니다. 삼각함수도 가르쳐주시고요. 중대장 훈시를 들으면서 강인 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언가 꽉 차고 무거운 분이란 느낌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저의 시야에는 그 분만이 들어와요. 어린 소견으로도 많은 장 교들 속에서 그 분만이 반짝반짝하는 것 같고 어쨌든 눈에 자주 뜨이는 거예요. 그 분이 내무사열을 하러 실내로 들어오면 어떤 기가 느껴지기 도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모셔보니 '아, 이 분은 이 정도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단박에 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사령관은 군기 담당이기도 한 박태준 대령에게 '후방부대는 일 선 과 멀리 떨어져 있고 대민접촉이 많으니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규율을 확립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또 박태준에게, 군수사예하 부대와 부산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체육대회를 동대신동 운동장에서 개최하도록 했 다.
 
 박 사령관은 여야 정치인들의 청탁에 대해서는 원칙에 의해서 처리했 다. 합리적인 부탁이면 야당의원이라도 들어주고 무리한 청탁은묵살했다. 자유당 실세 의원의 친척이 관련된 군내 부정사건도 철저하게 수사하도록 했다. 수사 책임자가 머뭇거리자 '자네는 사실대로 수사해. 책임은 내가 지는 거야'라고 했다. 그 자유당 의원이 항의차 사령관실을 찾아오자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해놓고는 끝내 만나주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박태준 대령은 그 때 한국군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고 있었다. 미군 보병학교와 행정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 현 대적전술학뿐 아니라 조직관리학을 배운 그는 1956년에 수색에서 국방연 구원(현 국방대학원의 전신)이 개교하자 국가정책 담당 교수가 되었다. 그때 교수부장은 유병현(합참의장, 주미대사 역임) 대령, 경제정책담당 교수는 이훈섭(철도청장 역임) 대령과 최영두(군정내각통제실 요원) 대령 이었다. 이 학교는 고급장교들에게 국가전략, 경제, 행정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시각을 제공했다. 이들은 5·16 뒤 국정운영에서 이 때 얻은 지식 을 활용할 수 있었다.
 
 국방연구원이 문을 열고 첫 시험기 과정(Pilot Course·6개월)에 학생 겸 강사로 참여한 사람이 이한빈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부흥부에 들어가 예산국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이씨는 젊은장 교들의 열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한빈은 당시 미국 육군에서 개발한 '기획예산제도'(Program Budgeting)를 우리 육군이 받아들여 적용하려 하 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 기획예산제도는 예산편성에 생산성과 효율성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나라 예산 편성은 부서별로 예산을 나누어 갖고는 무엇을 구입하는 데 얼마가 소요된다는 평면적인 계산만 하고 있었다. 군에서 도입한 기획예산제도는 어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의 돈을 투입하면 얼마의 성과가 나오는가를 따져 예산을 짜 고 계획-실행-확인 과정을 통해서 그 사업의 진도를 제도적으로 검증하도록 했다.
 
 이 선진기법은 5·16 뒤 군에 의해서 우리 행정기관에 도입되고 각 부처에 기획실장이란 자리가 만들어져 기획예산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이한빈(부총리 역임)은 국방연구원과 거의 동시에 세워진 육군 군수학교 에 출강하여 최고급 지휘관들을 상대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배운 미국 식 조직운영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5·16 뒤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당시 군대의 행정 수준이 민관 부문보다 훨씬 선진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민간관료들의 행정은 일제시대의 방법을 답습하여 법대를 나온 사람들이 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지만 군대에선 미군 제도를 받아들여 행정 전문가가 시스템을 통해서 조직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4·19계엄 령직후 나는 부산시청 통제관으로 근무했는데 공무원들의 낙후성을 목격 하고 놀랐습니다. 군대에서는 한글타자기를 써 요점주의로 문서들을 작성 하고 있었는데 공무원들은 펜대로써 '수제지건에 대하여'로 시작되는 유 장한 글을 쓰고 있더군요.'.
 
 젊은 군대의 한글타자기와 노쇠한 관청의 펜대. 그 상징성 만큼이나 당시 한국군 장교단은 양, 질 모든 면에서 기형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약 70만 대군이 정부 예산의 약 30%를 쓰고 있었다. 창군 이래 1960년말 까지 육군에서 도미 유학한 장병(대부분이 장교)의 누계는 7천49명이었다. 미국 보병학교 유학생이 1천5백51명, 포병학교가 1천2백2명으로 가장 많 았다. 장교들이 다녀온 학교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모학교, 화학학교, 이어서 공병, 군의, 병기, 병참, 통신, 부관, 경리, 군종, 기갑, 정훈, 헌병, 고사포, 수송, 심리전, 항공, 여군, 군수, 법무학교. 이 한국군 장교들은 미국여행을 통해서 전 술학뿐 아니라 조직, 경영, 기술을 배웠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 는지를 알고 '돼지우리 같은' 조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울분을 품고 귀국 하기도 했다.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한국군 장교단의 도미 유학자 비율(약 10%)이 더 높았다.
 
 1953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민간인 외국 유학자수는 모두 6백13명이었는데 이 해 장교 유학자는 9백83명이나 됐다. 이 도미 유 학장교들이 매개한 미국의 선진 방법론에 의해서 국군은 한국사회의 최강 집단에서 선진집단으로 질적인 변모를 하면서 거대한 개혁 에너지의 분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고 박정희는 이 잠재력을 정권장악과 국가개조에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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