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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60년 1월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한국군이 정권을 잡는 일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이다'는 잘못된 예측 을 한 미국 콜론보고서가 실린 1960년 1월호 '사상계'를 읽은 많은 장교 들 가운데는 박정희 소장도 있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관여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스칼라피노 교수는 5·16 직후 서울에 와서 박정희 의장을 만났는데 콜론 보고서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콜론 보고서 발간 1년여 뒤 5·16 새벽 한강을 선두에서 건넜던 김포 해병1여단의 김윤근 준장은 이 무렵엔 진해의 해병교육단장으로 근무중 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우인 해병 중위가 찾아오더니 '콜론 보고서를 읽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중위는 '콜론 보고서가 한국군의 기개 없음을 비웃고 있다'고 흥분하고 있었다.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데 군부가 방관만 하고 있을 수 는 없지 않겠습니까. 군부가 구국을 위해서 궐기할 때입니다.'.
 
 장교가 상관 앞에서 입에 담아선 안되는 이야기를 해도 부하를 나무 라지않고 달래야 할 정도로 이승만 정권과 한국사회는 벼랑을 향해서 달 려가고 있었다.
 
 '군인이 나서서 정치를 한다고 정치인들보다 잘 한다는 보장이 있나, 이사람아. 중남미 여러 나라의 예를 봐. 군인은 국방에 전념하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지.'.
 
 김윤근의 이런 원론적인 설득에 그 중위는 승복하는 것 같지가 않았 다고한다. 김윤근은 '콜론 보고서는 젊은 장교들을 분개시켜서 결국은 5·16군사혁명을 태동케 한 원인이 되었다'고 썼다(회고록 '해병대와 5· 16').
 
 1969년 1월 21일 박정희 소장은 6관구 사령관에서 부산에 있는 군수 기지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군수기지 사령부의 산파역 은 육본 군수참모부장 김웅수 중장이었다. 그때까지 군수 기능은 2군 사 령부 소속으로 부산 근처에 집결해 있으면서 7개의 기술부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김웅수 중장은 이들 부대를 공병감, 통신감, 의무감, 화학감 등 기술감 아래로 모았다. 그리고 이 부대들을 행정적으로 통합, 지휘하고 전시에는 군수지원을 총괄, 통제할 사령탑으로서 군수기지사령부를 창설했다.
 
 박정희를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추천한 이도 김웅수였다. 우리나 라 군대 조직의 관리에 미국의 선진 제도를 도입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김장군은 그때까지도 박정희를 만난 적이 없었다. 평판을 들어보니 박정희는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장군'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방대한 군수 물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는 적임이라 판단하여 그를 송요찬 참모총장에 게 추천하였고 총장도 쾌히 승인해주었다.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취 임식에 참석한 김 중장이 호텔로 돌아와 있는데 박정희가 찾아왔다.
 
 '각하, 이거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게 되겠습니까.'.
 
 김 중장은 '내가 족청 계열이라고 주목받고 있다니까 나를 떠보는구 나'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가 혁명을 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 장이라도 있답니까'라면서 말머리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해병 중위와 육군 소장이 똑같이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었 다.
 
 이시기가 문제인데 3월 15일로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온 나라가 요동치던 때였다. 조병옥 민주당 후보의 병사, 군내의 부정선거 공작, 3·15 부정선거, 바로 그날의 마산의거, 잇단 학생시위, 그리고 4·19로 달려가는 상황 속에 70만 군대가 있었고 그 안에박정희가 있었다. 용병이 아닌 국군은 국가와 국민, 그리고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돌 아가는 톱니바퀴이다. 급변하는 정치상황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군대 안 에서 박정희는 처음으로 '군사혁명'이란 말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그런 어마어마한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갈 정도의 불만이이 거대 집단 안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박정희가 김웅수 장군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말이 말에 머물지 않고 행동계획으로 구체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기자가 '5·16의 사관' 이낙선 전 상공부 장관(작고) 집에서 찾아낸 자료 중에 '군사혁명 참여자 증언 기록 카드'가 있다. '5·16군사혁명사'의 편찬 실무 간사였던 이낙선 중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이 수백 명의 참여자들로부터 청취한 증언이 연필로 기록된 200여장의 카드는 혁 명사 집필 때 1차 자료로 쓰여졌다. 이 카드에 의하면 최초로 '군사혁명' 이 논의된 시기는 4293년(1960년) 1월이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박 장군은 서울 신당동의 자택에서 김동하 소장(포항 주둔 해병 제 1상륙 사단장)과 만나 '급진하는 민심의 동향과 결과적으로 군부에서 이 를 수습해야 한다는 수습책을 논의하고 이를 추진키로 합의했다'. 다음 날에는 김동하 장군 집에서 두 사람이 만나 '해군, 해병대는 김동하 장 군이, 육군은 박정희 장군이 각각 맡아 조직력을 갖추기로 합의했다.'>.
 
 이 최초의 구상은 그 다음해 5·16을 성공시킨 부대 동원의 기본이 되었다. 김동하 장군이 김포에 있던 해병1여단을, 박정희가 공수단, 6군 단포병단 등 나머지 육군부대를 동원했던 것이다. 김동하 소장은 박정희 의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였다. 그 20년 전 만 스물세살의 박정희 교사 는 '긴 칼을 차고 싶어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만주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 그 뒤 20년 동안 그는 한시도 국가와 혁명과 권력이란 화두를 놓지 않고서 생사를 오가는 위기와 고통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고목같은 이승만 정권의 황혼, 분출하는 학생과 민중의 원망은 박정희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20년 동안 깔아놓은 자신의 인맥, 그 그물을 잡아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가 공개적으로 언론 앞에 등장한 것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 임한 직후의 기자회견이 처음이었다. 당시 부산일보의 군 출입기자 김종 신은 이런 관찰기를 남겼다.
 
 <박 장군의 걸음걸이는 작은 키와는 반대로 무척 육중하게 보였다.시 멘트 바닥에 움푹 발자국이라도 낼 듯이 힘차게 한발 한발을 옮기며 걸 어왔다. 나는 팔뚝 시계를 보았다. '이번 사령관은 또 얼마나 늦으셨누' 하는 장난스런 심경에서였다. 시계바늘은 정확하게 90도, 1분이 틀리지 않는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육중하나 느리지 않은 걸음걸이, 90도 의 시계바늘, 이 두 가지 영상은 그의 진로를 예견케 하는 것이었다.> ('령시의 횃불')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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