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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력으로 혁명 막지 않을 것
 미,실력으로 혁명 막지 않을 것
 
 육사8기 출신으로서 1960년에 방첩부대 중령이었던 전재구의 경우 12년의 복무기간중 1년7개월을 교육받는 데 보냈다. 미국에 가서 보 병학교에서 6개월, 정보학교에서 2개월, 귀국해선 육대에서 6개월,그리고 원자력 학교에서 2개월간의 교육을 받는다. 1950년대 후반 주한 미군에 핵무기가 도입된 것과 보조를 맡추어 한국군에선 핵전에 대비 한 원자력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대학에 원자력공학과가 설치되기 전이었다. 민관부문에선 아직 재교육이란 개념이 도입도 되기전에 장 교들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의 기능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국군에 미국식 행정제도를 도입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웅수 소장은 5·16쿠데타 때 6군단장으로서 박정희에 협조 하지 않았다가 옥살이를 한 뒤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가톨릭 대학에 서 교수(경제학)로 근무했다. 요사이는 건양대학교(충남 논산 소재) 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한국군의 질적, 양적 팽창이 5·16의 한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1960년 당시 한국의 대표적 조직체는 군대, 경찰, 정당, 행정부 서였습니다. 정치와 행정조직의 생산성은 퍽 낮았습니다. 경찰은 서 열질서를, 군대는 무기를 가진 강력한 조직이었습니다. 도미 유학 장 교들이 많은 군대는 국제화되어 있었고 미 고문관들은 국군의 각 부 대에 조직관리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도미 유학 장교들은 민주주의를 배우러 간 것은 아니지만 서구 선진사회의 작동원리를 배우고 왔습니다.
 
 국방연구원은 장교들에게 정치, 외교, 경제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정부고관들의 강의 수준에 대해서 이 장교들은 '저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우리가 하면 훨씬 잘하겠다'는 자신감을 갖기도 했지요. 한국군 장교단은 점차 정치화되어 갔는데 이를 억제해야 할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니 군대가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 입니다.'.
 
 1960년 육본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육사8기 이영근(유정회 총무역 임) 중령은 '장교들은 영내에서 점심을 굶고 '불식미'라는 전표를 모 아 쌀로 바꾸곤 그릇도 마땅치 않아 신문지에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 곤했다. 미국에 군사유학까지 간 장교가 쌀이 부족해 군용파카의 털 달린 안감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살던 시대였다. 울분이 절로 솟았다' 고 했다.
 
 1960년 육군연감에 따르면 이해 복무중 각종 사고로 죽은 군인은 1천3백47명이나 됐다. 요사이 군 사고 사망자 비율보다 3-4배나 높았 다. 사인별로는 근무중 순직사 45명, 병사 3백78명, 자살 2백51명.이 해 탈영자는 1만6천7백87명이나 되었고 월북자는 12명, 월북기도자는 6명. 군기 위반으로는 무임승차가 많던 시절이었다. 1956-60년 사이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강호창(인천 거 주)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증언했다.
 
 <휴가 나간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견디겠다'고 귀대를 거부하는 판이었다. 날마다 군단 장 숯굴, 사단장 숯굴, 연대장 숯굴, 대대장 숯굴의 숯을 구워주는데 동원되고 땔감과 건축자재용 목재를 잘라내는 데 사역을 하다가 보니 중대원 1백명 가운데 부대에 남아 있는 인원은 10명 남짓했다. 상부 에서 검열이 오면 이웃 부대에서 병력을 꾸어와서 속여넘기기도 했다. 많은 장교들이 도둑질로 먹고 살고 있었다.
 
 화천시내로 훈련을 나가 던 우리 중대의 트럭이 낮게 드리워진 여당 의원의 선거 프래카드를 건드려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다. 부대원들은 방첩대에 몽땅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5사단에 가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뒤에 알고보니 사단장은 박정희 준장이었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군대의 이런 모습은 정치의 계절에 휩쓸 려 들면서 더욱 이그러진다. 이낙선의 '5·16혁명사 증언록'에 따르 면 1960년2월에 들어가면 박정희 군수기지 사령관의 행적이 분주해진 다. 포항의 해병상륙사단장 김동하 소장과의 합의로 시작된 모의는 포섭범위를 넓혀나갔다. 박정희의 증언록을 옮긴다.
 
 <동래 온천장 별관, 백녹관 숙소, 해운데 호텔 등지에서 김동하, 이주일(당시 2군 참모장) 소장, 홍종철(6군단 작전참모)중령, 전두열 대령과 만나서 혁명을 의논했다. 당시의 정세는 3·15선거를 앞두고 군내에서도 3인조, 9인조, 비둘기작전 등 공공연한 부정선거 지령이 군 고위층으로부터 하달되고 있었다. 청년 장교들의 구국의 일념이 고조되고 있었다. 혁명에 동원할 부대로는 포항 해병사단, 2군사령부 예하 부대, 김포주둔 해병여단을 검토했으나 계획의 중심지가 부산이 기 때문에 곤란이 있었다. 때마침 장도영 2군 사령관이 부산으로 내 려왔다.
 
 나는 그를 해운대 호텔로 초치하여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넘 어뜨리고 군부에서 일어나야겠다는 계획을 설명하고 그의 협조를 요 구하니 그는 원칙에는 찬동하면서도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좀더 두고 연구하자고 다짐했다.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도미하는 1960년 5월8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작전계획은 '이주일 참모장이 2군 병력 을 지휘하여 부산을 점령하고 해병사단이 부산에 출동한다. 인천고사 포단과 김포 해병여단은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안동 36사단장 윤태일 준장은 김동하 소장과 만주군관학교 동기로 서 박정희보다 1년 선배였다. 그도 이 모의에 가담, 영주점령의 임무 를 받았다. 박정희와 김동하는 방첩대의 감시를 피해서 경주에서 여 러번 만났다. 박정희는 경주로 놀러가는 것처럼 위장했다. 한번은 자 신의 대구사범 동기로서 부산에서 내과의사로 있던 조증출을, '육군 병원 간호사들과 함께 경주로 놀러가자'고 꾀어내어 데리고 가서는 불국사에서 김동하와 밀담하는 것을 야유회로 위장했다.
 
 그때 부산일보의 편집국장 겸 주필은 황용주였다. 박정희와는 대 구사범 동기인데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학교 당 국에 들켜서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황용주와 박정희는 자주 어울렸다. 황용주는 박정희가 미국과 미군이 가장 큰 혁명의 장애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려고 했다.
 
 '나는 미국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남 미의 소소한 나라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도 미국은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도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펴고 그 다음해에는 마음대로 반공포로를 석방했지만 미국은 실력으로 막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주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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