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인 이석제중령
박정희는 이낙선에게 구술한 '5·16혁명사 증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4·19 학생 혁명 직전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에 들러 2군 사령관인 장도영 중장을 만났다.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함 께 일하자고 했다. 장 장군은 그 취지엔 찬동하면서 그 시기, 방법을 더 연구하자고 답했다. 나는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쯤이 적당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장 장군은 '얼마 전 밴플리트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이 대통 령을 보았는데 건강상태가 아주 형편이 없으니 아마 금년에는 이기붕씨가 집권하게 될 것 같다. 그때 군이 비상수단을 써서 군정을 하자'고 말했다. 눈치를 보니 생각은 있으나 결심은 못하는 것 같으므로 나는 '그 렇다면 이 계획은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와 손 잡고 일하지 못할 바 에야 하지 않는다고 말해두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는 귀대하 였다. 이때 서울, 부산, 전방 등의 조직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으며 2군 은 사령관만 호응하면 거사는 쉽게 될 것으로 판단하여 장 장군을 포섭 키로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 장군은 직접 행동에서는 제외키로 작정 하였다. 그는 뜻은 있어도 결단은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 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 밑에서 인사참모로 있던 박태준 대령은 혁명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사령관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박 대령은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는 것을 바라 보면서 사령관이 학생들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졌다. 영국 기자가 썼던 대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 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쓰레기가 충분히 썩을 때는 장미를 피어내는 거름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이란 쓰레기통은 모든 모순덩 어리가 뒤죽박죽으로 뒤엉키고 발효하면서 발열하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꿈과 시대를 낳으려는 산통이었다. 이 모순의 극치를 경 험하면서 현실타파의 방법으로써 혁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두 조직된 젊은 집단 약10만의 대학생들과 약70만의 군대였다. 이들은 20대의 순진한 정의감과 30대의 정열과 40대의 야망을 에너지원으로 하 고 있었다. 20대 장정과 30, 40대 장교들로 구성된 이들은 해방 후 민주주의 교육과 미국식 조직관리술을 배운 신한국인이었다.
이들을 다스리고 있던 정치인들은 이승만 같은 독립투사, 장경근 같 은 일제시대 관료출신, 많은 민주당 의원 같은 지주 출신들이었다. 나이 도 80대에서 60대에 걸쳐 있었다. 1960년 현재 이승만이 85세, 장면이 61세, 윤보선이 63세, 허정이 64세였던 데 대해 박정희는 43세, 송요찬 은 42세, 장도영은 37세, 김종필은 36세였다. 이들 젊은 집단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면서도 노쇠한 여야 정치지도자들을 싸잡 아'무능하고 부패한 사대적, 봉건적, 당파적 정치세력'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성균관 대학교정치학과 김일영 교수는 자유당-민주당 세력을 전통 사회에 기반한 전통엘리트로, 5·16이후에 새로 등장한 군부세력을 국가 엘리트로 분류한다. 통상적으로 전통엘리트는 파당적 이해관계에 집착하 는 반면, 국가엘리트는 국익과 국가발전의 추구에 힘쓴다는 것으로 정의 된다.
1960년 봄, 학생들은 민주에 관심이 많았고 장교들은 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이 구세대에 대한 절망을 시위로써 표현하고 있을 때 젊 은 장교들은 혁명모의로써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여러 갈래로 움직 이던 군내의 혁신세력 중 한 갈래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었다.해병대, 송 요찬, 족청계 장교들도 정치적인 뜻을 키워가고 있었다.군대를 정치에 이용해온 정권은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던 셈이다.
'처자식을 굶겨죽이지 않고 먹여살린 장교들은 모두 도둑놈이다'란 자조적인 말이 나오는 군대에서 '군 본연의 임무는 오로지 국방'이란 원 칙론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육대교관 이석제 중령은 월급으로는 15일간만 식구를 부양할 수 있 었다. 며칠째 양식이 떨어져 식구들이 곡기를 끊을 때 그도 일어설 힘이 없어 출근을 포기하고 누워서 맹물로 허기를 달래는 판이었다.
<참다 못한 집사람이 양식을 구해 보겠다며 나서는 것을 말릴 수 없 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디 가서 보리쌀이라도 구해다가 식구들 허기 를 채워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졸장부로 전락한 것이다. 고급장교가 부대 보급품에서 퍼낸 쌀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귀가하는 모습이 군대 사회 의 일반적 풍속도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양식을 얻어러 나갔다가 눈물을 훔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는 장교를 제대로 먹이 지도 못하는 이러한 군대에 더 이상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다. 나는 군 에대한 미련을 버리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이석제는 그 뒤 낮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기 시작했 다. 그가 법률 공부를 하면서 놀란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렸던 일본법과 미군정 시대에 공포된 영어로 된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진 것이 1948년인데 아직도 식민지, 군정시대 법률을 번역도 하지 않고 일어, 영어로 나라를 다스리 고 있는 자유당, 민주당의 국회의원과 각료, 공무원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석제 중령은 고시 공부의 경험을 살려 5·16 뒤에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 법령 정비 및 한 글화 작업을 하게 된다. 그 뒤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으로 약 14년간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의 개혁과 현대화를 주도했다.
이석제가 1년반 동안 계속하던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군사혁명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3·15의거와 4·19로 이어지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였다. 이석제는 민간 정치인들이 나라를 맡고 있는 한 국민들은 '꿈도 없 는 자포자기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육사8특기 출신인 그는 '강의 자료 수집'이란 명목으로 육본과 야전군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동기생들을 설득했다.
'정신 못차린 정치 모리배들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은데 우리 같이 나라를 뒤집어보세.'.
이석제 중령은 그러다가 김종필 그룹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박정희와 연결된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