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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희생자 위령제 조사… 학생시위 찬양
 ·19희생자 위령제 조사… 학생시위 찬양
 
 부산계엄사무소장 박정희 소장의 행동을 가까이서 관찰한 기자로서는 당시 부산문화방송 보도과장 전응덕이 있다. 박소장은 4월19일 계엄경이 펴지자 우선 부산언론기관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국제신보 이병주편집국 장겸 주필, 부산일보 이상우편집국장, 그리고 전응덕을 사령관실로 불렀 다.
 
 전응덕과장은 공보실장 이낙선소령으로부터『사령부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동안 시위를 선동했다고 잡아넣으려는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전과장은 좀 늦게 사령관실로 들어갔는데 박소장이 의외로 웃는 얼굴로 맞았다. 『전응덕씨가 진행하는 방송 잘 들었습니다. 사 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그때 문화방송은 마산, 부산시 의 현장 속으로 녹음기를 든 기자를 들여보내시위 현장 방송을 했고 전 과장은 아침에 시사해설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세 보도책임자들에게 계엄업무에 협조해 줄것을 당부하면서 『오늘은 발표가 늦어 어차피 통 행 금지를 저녁7시부터 실시할 수 없으니 저녁9시부터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때 송요찬계엄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왜 부산에서만 통행금지를 9시로 늦추었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상황을 설 명한 뒤 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그는 『내가 알아서 하는데 말이야…』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4월24일 부산 교외 범어사에서 4·19 시위 희생자 13명에 대한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은 친학생적인 조사를 했다.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기 위하여 꽃다운 생명을 버 린 젊은 학도들이여! 여러분의 애통한 희생은 바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선배들의 책임인 바, 나도 여러분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같은 비통 한 순간을 맞아 뼈아픈 회한을 느끼는 바입니다. (중략). 로마는 하루아 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고귀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오늘 여러분들의 영결은 자유를 위한 우리들과의 자랑스런 결연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중략). 여러분들이 못 다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습니다. 부디 타계에서나마 영 일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이 조사를 듣고 있던 부산문화방송 전응덕 보도과장과 부산일보 김종 신기자는 '후련하기도 하고 간담이 서늘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아직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특무대원들의 눈이 번득이고 있는데 '여러분이 못다 이룬 소원을 기필코 우리가 성취하겠다'니, 이건 반정 부 선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긴장했다는 것이다. 김종신은 '영시 의 횃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맥빠진 천편일률적인 조사에 지루해진 동원학생들은 모두 엉거주춤 히서서, 어떤 학생은 간간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는데 박 장군이 조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듯 숙연해졌다.>.
 
 이 연설을 녹음해간 부산문화방송 전응덕은 방송하기 전에 군수기지 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었다. 이낙선 공보실장에게 '이 연설을 내보내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낙선은 '잠시 기다려달라'면서 박정희에게 물어보 고는 '사령관께서 알아서 하라고 하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5·16거사 뒤 이 연설의 녹음테이프를 보내달라고 전응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민심과 군심이 같이 돌고 있었다. 4월20일 오전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5대 도시는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시민들에게 보복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엄단하겠다'고 했다.
 
 22일 서울 동대문 경찰서는 18일에 있었던 고려대학생 습격사건에 가 담한 깡패 13명을 구속했다. 23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나는 이런 고문 을 당했다' '들어가자 몽둥이질, 이래도 치고 저래도 치고' '방망이로 파리잡듯 총으로 누르고 발로 차고'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자유당과 경찰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계엄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고 있었다.
 
 23일 경찰은 고대생 습격사건을 지휘한 혐의로 유지광, 임화수를 구속했다. 24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서울 용산경찰서와 성북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정치사찰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집단 사표를 냈다'고 보도했다. 24일 계엄사령부는 '25일부터는 언론검열을 철폐하고 통금시간도 종전으로 돌린다'고 발표했다.
 
 4월21일 국무위원들 전원이 유혈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22일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3·15부정선거에 의해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을 사퇴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국무위원들은 홍진기 내무장관과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을 자진사퇴시키는 악역을 맡겼다.두 사람은 이 기붕이 사는 서대문으로 향했다. 이기붕은 19일 오후 서대문 자택으로 시위대가 몰려오자 지프를 타고 포천 6군단으로 향했었다.
 
 당시 6군단장은 강영훈 중장, 비서실장은 이성재 중령이었다.이 중령 이 군단장실 앞에 당도한 지프로 마중을 나갔다. 운전사 외에 네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앞 자리엔 국회의장 비서인 전영배, 뒷자리엔 이기붕과 박 마리아 부부, 그리고 차남 강욱이 있었다. 이기붕은 무릎을 담요로 덮고 있었고 그와 강욱 사이엔 변기용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강영훈 중장은 이기붕을 군단장 숙소로 모시려고 지프의 앞자리에 올랐다. 이기붕은 차 중에서 '소요가 일어나 집에 있을 수가없었소. 창동에 있는 검찰총장 별 장으로 갔는데 거기엔 전화가 없어서 이리로 오게 되었소'라고 했다. 이 날 저녁 강영훈 군단장은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 건을 보고했다. 그 직후에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하여간 안정을 취하게 잘 보호해드리십시오.서울은 안정되어가니 안 심하라고 하십시오.'.
 
 저녁에 강 장군이 이 중령을 부르더니 '지금 저 양반이 식사를 전혀 못하는데 미 고문관에게 부탁해서 과일 주스를 좀 구해다 주게'라고 했 다. 이기붕은 부축을 받지 않고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동할 때는 업혀서 했다. 말도 박 마리아가 통역을 해주는 실정이었다. 박 마리아가 '이런 뜻이지요'하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기붕 가족은 6군단 장숙소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21일은 박 마리아의 생일이었다. 이성재 중령이 꽃을 꺾어드리니 감격하는 표정을 지었다. 21일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 집으로 돌아갔다. 강 군단장은 참모장더러 모셔다 드리라고 했는데 그는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의장을 모시고 먼저 경무대로 갔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설 기던 사람들이 본 채 만 채 했습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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