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학 지방정권
4월27일 오전 미국 대사관으로 간 김정렬 국방장관은 매카나기 미국 대사에게 따지고 들었다.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서 군인이 수반이 되는 정부를 지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아니, 지금 한국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있는 거요?' '지금 허정씨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사태 를 해결하도록 다 되어 있는데 이것을 뒤엎고 송요찬 장군에게 정권을 잡으라는 투로 의사를 전달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하지만 나는 허정씨를 모릅니다.'.
'당신이 허정씨를 모르는 것이 미국측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 원 인이오?' '그렇지는 않소. 미국은 민간 정부를 원하고 있지만 현 단계에서는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한 정부가 당분간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 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을 따름이오.'.
'그렇게 하면 미국 역사상 오점으로 남을 것이오. 이 정책을 수정할 여지는 있소?' '오늘 전보를 쳐서 다른 훈령을 받기를 요청하면 가능할 것이오.'.
김정렬 장관은 허정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소개를 하고는 미국 정부 가 허정 과도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줄 것을 요망했다. 매카나기 대 사는 '알았소. 그러면 본국에 다시 보고서를 올려 새로운 훈령을 받아 보기로 하겠소'라고 약속했다. 미국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부터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지면 한국군의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워 질서를 유지하 도록한다는 비상계획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카나기 대사와 매그루더 8군사령관은 이런 비상계획에 따라 송요찬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과도정부 수반으로 밀려고 하다가 이승만의 합헌적 권력이양으로 해서 제동이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계엄사무소장으로 있던 부산에서는 이승만 하야 방송이 퍼진 26일 오후부터 축제 같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시 위대는 수많은 트럭과 버스들을 빼앗아 타고 시내를 질주했다. 시외로 나가다가 차가 뒤집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큰 길로 몰려 나와 정권이 뒤집어지는 현장의 흥분을 체험하려 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도 그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다.
부산진역 앞 동부산 경찰서는 모든 경찰관들이 달아나 버린 상태에서 시위대의 수중에 넘어 갔다. 시위대는 경찰서에서 탈취한 서류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뿌렸 다. 대로를 허옇게덮을 정도로 서류들이 흩어졌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트럭 위에는 시위대가 빼곡이 타고 있었다. 제지하는 군인은 보이지 않 았다. 군인들도 경찰과 함께 철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군인도 경찰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데모의 자유 속에서 시민들 은 정권이 뒤집어지는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일단의 시위대는 경남도청으로 몰려갔다. '신도성 지사를 잡아라!' 고 함성을 지르면서 도청을 포위한 시위대를 향해서 헌병들을 태운 트 럭이 달려왔다. 박정희 소장은 병력을 도청 주변에 배치한 뒤 승용차에 서 내렸다. 그는 덮개를 걷은 지프로 올라갔다. 예복차림이었다. 박정 희는 확성기를 잡더니 침착하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우리 군은 여러분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닙니 다. 이 앞에 보이는 군인들과 장갑차는 여러분의 피땀이 스며 있는 세 금으로 지어진 이 도청과 귀중한 국가재산을 지키려고 온 것입니다. 여 러분 냉정해 주십시오. 우리가 싫어하던 이승만 부패정권은 물러갔습니 다. 우리 다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박 소장은 시위대와 함께 만세3창을 했다. 만세를 부르고 난 시위대 는 그만 돌 던질 마음이 사라져 버려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이날 오후 경고문을 발표했다.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밤 7시부터 다음날 5시까지로 연장한다. 군및 보도용 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의 통행을 무조건 금지한다. 폭행 방화 범은 계엄법에 의거하여 처단한다. 시위중 입수한 무기나 흉기는 즉시 당국에 신고하라. 유언비어를 유포하지 말라. 파괴와 약탈 방화를 일삼 는 불량배와 깡패들은 백만 시민 스스로가 철저히 단속해주기 바란다. 시민은 주권을 찾았으니 흥분된 마음을 질서회복에 돌려주기 바란다.> 박정희 소장은 시내 전경찰서가 경찰관들의 피신으로 마비상태에 빠지 자 임시경찰을 편성했다. 소령급 장교들을 경찰서장으로, 소위-중위를 파출소장으로 임명했다. 부산대학교 등 5개 대학교 학생 대표들을 불러 각대학별로 6개 경찰서를 맡아 학생들이 치안을 유지해 주도록 했다.부 산대학총학생회장 이동용(현재 현대자동차판매서비스 경인본부장)은 박 정희 사령관을 보는 순간 '대추방망이'를 연상했다. 박정희는 학생회 간부들에게 다과회를 마련해주면서 질서유지를 위해 군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이동용을 문화방송으로 보내 '내일 아침 9시까지 대학생들은 부산시청 앞에 집합하라. 질서 유지에 우리가 나서자'는 방 송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부산에서는 일시적으로 군인과 학생이 합동하여 일종의 지방정권을 만든 셈이 되었다. 부산대학교는 중부산경 찰서와 동래경찰서, 수산대학은 동부산경찰서, 연세대학은 영도경찰서, 부산사대는 부산진 경찰서, 동아대학은 서부산경찰서를 맡았다. 국제신 보 27일자사회면 기사들--.
<분노의 군중이 휩쓸고 지나간 경찰서 안에는 정복 경찰관은 한 사 람도 찾을 길이 없다. 주인은 없어지고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만으로 꽉차 있다. 경찰관들은 사복으로 나타나서 인근 다방에 앉아 기가 막힌 다는 듯이 커피만을 마실 뿐… 파괴된 파출소에선 사환아이만이 폐허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박정희 사령관은 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았 다.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그를 찾아가서 계엄군의 이런 자세를 비판 했다.
'군대가 왜 그런 데 나가노.' '군대가 국민의 재산을 지켜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내보내면 군대와 민간인 사이에서 불상사만 난다고.'.
부산일보 사장이자 유명한 기업인인 김지태의 집도 시위대가 던진 돌에 부서졌다. 김종신이 동료 기자들과 함께 경비를 서야 했다. 김종 신은 박정희를 찾아가 헌병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안돼. 그런 사람은 혼 좀 나봐야 돼.'.
할 수 없이 김종신은 개인적으로 친한 헌병대장에게 부탁하여 도움 을 받을 수 있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