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정권 붕괴…곳곳서 이기적 시위
4월28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은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로부터 전 화를 받았다. 매카나기 대사는 김 장관이 전날 요청했던 사안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과도정부수반으로 민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허정외무장관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것과 이기 붕 내외의 미국 망명을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통보를 하던 매카나기대사는 '그런데 경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들으셨 소?'하고 묻는 것이었다.
'글쎄요,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나도 궁금해요.'.
전화를 끊고 김정렬은 청와대로 달려갔다. 본관으로 가니 비서관들 과 경찰관들이 바깥에 둘러서서 밖으로 나오는 누군가를 막고 있었다. 김장관이 가까이 가 보니 이대통령 내외가 바깥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노대통령은 막아선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김 장관도 엉 겁결에 막는 쪽에 합세했다가 옆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새벽에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습니다. 각하께서 그 현장으로 가시 겠다고해서 이렇게 막고 있습니다.'.
김정렬은 이기붕이 묵고 있었다는 경무대내 별관36호실쪽으로 달려 갔다. 4·19직후 사임한 홍진기에 이어 내무장관으로 발탁된 이호 장 관이 걸어올라오면서 김 장관을 붙들었다.
'김형, 내려가지 말어. 봐도 소용없고 일생 동안 참혹한 기억이 남 을 터이니 내려가지 말어.'.
김정렬은 이 장관에게 끌려 대기실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바로 오늘 아침 매카나기 대사로부터 망명 알선이 잘 되었다는 소 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검찰은 이기붕 일가 변사 사건의 현장을 조사하고 시체를 검안한 뒤 '합의된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유서는 없었다. 권총은 모두 다섯 발이 발사되었다. 이강석만이 머리와 가슴에 두 발을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한 발씩 맞았다. 세 발은 28일 새벽 5시50분경 연속으로 발사되었고 4,5분이 지나서 두 발이 발사되었다. 이기붕은 상의를 의자에 걸어놓고 속셔츠만 입은채 로 숨져 있었다.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워있었고 이강석은 가로로 쓰러져 있었다.>.
이기붕 가족이 피신해 있던 6군단 부군단장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 내고 경무대 별관으로 돌아온 것은 26일 밤이었다. 6군단장 비서실장 이던 이성재 중령에 따르면 경무대 경찰서에서 차를 보내 이기붕 일가 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때 이미 서대문 자택은 시위대의 습격을 받 고 있었으므로 이기붕은 경무대로 갔다. 이기붕 일가가 죽은 뒤 일부 언론에서는 강영훈 6군단장이 이기붕 일가를 외면하는 바람에 서울로 돌아와 자살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강영훈 전 총리는 '내가 그런오보를 한 기자에게 항의했더니 '사실관계는 알지만 이렇게 써야 장군님께 유리하다'고 변명만 하고 정정해주지 않았다'면서 '그 뒤 자 유당에서는 날 욕하고 민주당에선 갈채를 보냈다'고 했다.
4·19유혈사태에 이은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그리고 이기붕 일가의 자살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한국 사회에서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인규 등 3·15 부정선거 주범 구속, 김구 암살 등 과거 정치적 사건의 재조명 요구, 경찰 등 권력기관 간부 퇴진, 서 민호, 강문봉 등 전정권 때의 정치사건 수감자 석방, 교장 총장 배척 운동,학생들의 동맹휴학, 좌익의 정치세력화, 시위의 난동화 등 그 뒤 에도 정권교체기마다 되풀이되는 정형화된 혼란이었다. 4월28일 계엄 사령부는 북한과 조총련이 남한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 불온문서를 학교와 학생단체로 보내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논객 월트 리프맨은 4월2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기고한 '한국이란 우리의 두통거리'란 제하의 칼럼에서 '한국은 그 자신의 독 립과 자유를 스스로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계속 미국의 피 보호국이며 피후견국의 지위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 가 한국을 위해 흘린 피를 값싼 농담으로 만들어버린' 이승만 정권을 퇴진시킨 데 기여한 미국정부의 조치를 옹호했다. 29일 AP통신은 '시 산혈해의 유혈사태로 전락할 뻔했던 한국사태가 이승만 하야로 수습된 데는 한국군의 자제가 큰 기여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만 해도 송요 찬 계엄사령관의 인기는 좋았다.
29일 신문들은 '송요찬 장군의 국방 장관 입각설'을 보도했다. 이날자부터 모든 신문은 터키에서 발생한, 반멘데레스 수상 유혈 학생시위로 계엄령이 선포된 사건을 연일 크게 다룬다. 기사들은 이 학생시위가 한국 학생들의 용감한 행동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신문지면은 온통 국내외의 시위 사태로 채워지고 있었다.
4월30일 수도육군병원 강당에서는 자살한 이기붕 일가 네 명의 영 결식이있었다. 이틀 전 이화장으로 물러났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양자 인 이강석의 관앞에 앉아 한 10분간 영정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짓다가 측근의 만류를 받고 식장을 떠났다. 4월30일자 조선일보의 사회면은 학원내 진통으로 채워져 있었다. '민주혁명은 학원내로'란 제하에 '어 용학자를 숙정-학생들 궐기에 일부 교사도 동조' '서울대-학도호국단 해체주장' '성균관대 -총장사퇴를 요구' '경희대-총장 축출 움직임'이 란 작은 제목의 기사들이 지면을 뒤덮었다.
이날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홍종인의 시론은 '민의를 떠난 개헌은 있을 수 없다'면서 '정계 혁신을 위해 현 국회의원은 사퇴하라'고 요 구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현 국회 를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을 치르면서 개헌여부를 국민에게 물어야 한 다'는 주장이었다. 홍종인은 '오늘의 사태를 가져온 책임의 일단은 신 파, 구파로 나뉘어져 싸움질을 해온 민주당에도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왔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의 정당'을 자처하던 민주 당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한 글이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4·19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도 못한 민주당이 유혈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데 대한 반감뿐 아니라 민주당도 결국은 지주, 일제관료 출신 자들을 주축으로 한 구태의연한 정치세력으로서 본질적으로 자유당과 같은 뿌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박정희도 그런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조갑제출판부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