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사주설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을 만나고 올라온 김종필 중령은 5월8일 육사 8기 동기생 여덟명과 회동하여 연판장을 쓰기로 합의한다. 8명은 김종필 이외에 김형욱, 길재호, 석창희, 신윤창, 옥창호, 최준명, 오상균중령이 었다. 이들은 김종필에게 연판장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맡겼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4·19 혁명정신으로 정군해야 한다. 정군 대상자에게는 우선 개인 적인 권고로 자진사퇴 형식을 취한다. 권고에 응하지 않을 때는 지휘 계 통을 통해서 건의하여 사퇴를 종용토록 한다. 그래도 정군이 부진 할때 는 국방장관 직속으로 '정군 심사위원회'를 설치, 정군을 추진한다. 제2 공화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정군은 새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과도기 나 진통기에 과감히 추진한다.>.
며칠 뒤 최준명 중령은 서울 지구 계엄부대장인 15사단장 조재미 준 장을 찾아갔다. 한국전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조 준장은 자리에 없었다.
최 중령은 사단장 부관과 잡담을 하던 중에 사단장에게 할 말을 부 관에게 다 털어놓고 떠났다. 그 후 부관은 사단장에게 '8기생 중심으로 참모총장 축출 운동이 일어날 것인데 그때는 사단장님이 중립을 지켜달 라는 부탁을 최준명 중령이 하고 갔다'고 보고했다. 지금 대전에 살고 있는 조재미 당시 준장은 '내가 최 중령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 지금은 군이 안정되어야할 시점인데 그런 일로 혼란을 일으켜선 안된다고 나무 랐다. 내가 송요찬장군에게 알렸다는 말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 었고 송 장군이 다른 경로로 그런 움직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고 말했 다. 송 총장은 방첩대에 조사를 지시하여 5월17, 18 양 일간에 걸쳐 김 종필등 5명을 국가반란 음모 혐의로 구속시켰다.
박정희는 송 총장에게 '용퇴하라'는 편지를 쓰고 김종필은 연판장을 씀으로써 군대의 상층부를 흔들어놓는다. 박-김 라인에 의한 최초의 협 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처삼촌-조카사위 사이가 동지적 관계로 변모한 것이다. 김종필과 8기 동기생들이 연판장 건으로 분주할 때 박정희 부산 지구 계엄사무소장은 '조총련계 사주 시위설'에 휘말려 고생하고 있었다.
5월2일 중-고교가 휴교 15일만에 개학하자 부산에서 특히 시위가 많 이 발생했다. 2일 오전 부산에선 대학교부터 중학교까지 40여개 학교 학 생들 2만여명이 시내로 쏟아져나와 '국회는 해산하라' '썩은 국회는 개 헌할 자격 없다' '기성정치인은 물러가라' '김일성을 타도하자'는 구호 를 외쳤다. 중앙지 사회면 기사는 '학생 데모, 또 부산서'란 제목을 달 정도였다.
4·19 이전에 용감한 시위를 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 열등감을 풀기 위해서 더 과격한 구호를 내걸기도 했다. 5월3일 조선일보에는 전남 광 주에서 외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이모씨가 데모를 하지 않았던 서울 유 학중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었다. '데모 대열에서 빠진 딸에게, '부끄러운' 아버지로부터'란 부제가 달린 기고문의 제목은 '너는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였다.
<부모 있어도 넌 시대의 고아/'비굴한 행복'보담 '당당한 불행'을 기다렸더니/애써 공부시킨 이 애비가 괴롭다.>.
5월3일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은 부산 일원의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저 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5시까지로 연장했다. 오후4시부터는 차량통행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되니 회사는 오후3시에 문을 닫고 차없는 거리를 걸어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4일 오전에도 부산의 학생시위는 계속되었다. 중학생 수백명이 중심 지 중앙동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면서 헌병들이 탄 트 럭과 장갑차 대열이 나타나 학생들을 쫓기 시작했다. 헌병 트럭대열의 맨앞에 박정희 사령관이 탄 세단이 달렸다. 차량 대열이 데모 대열을 서 서히 관통하자 중학생들은 달아나버리고 데모대는 흩어져버렸다.
부산역 광장 앞에 도착, 정열한 헌병들을 해산시킨 박정희는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오더니 문짝의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숙인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생각에 빠져 있는 박정희의 레인 코트가 한쪽 어깨에서 벗겨져 내리고 있었다. 모자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군복을 적셨다. 반짝이는 두 개의 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구두닦이 소년 이 벗겨져 내리는 코트를 다시 걸쳐주었다. 박정희는 명상에서 깨어나 미소를 지으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 던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를 발견하자 박정희는 화풀이를 했다.
'당신네들 선동하다가는 이 모양이오. 글쎄, 데모도 좋지만 저런 중 학생들이 무얼 알아서 거리로 나오는 거요.'.
박정희는 자신의 화풀이에 겸연쩍어졌는지 김 기자를 향해서 '우리 차나한 잔 할까'라고 했다. 두 사람은 다방에 들어갔다. 김종신은 '연장 된 통행금지 시간으로 사무실 근무자들은 집에도 못가고 회사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면서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데모보다 더한 사태가 날 겁니 다'라고 했다.
'그럼 오늘부터 통금시간을 종전대로 환원하지.'.
김종신 기자는 벌떡 일어서면서 '그렇게 기사를 써도 좋습니까'라고 다짐을 했다.
'물론 기자라면 기사를 써야지.'.
박 사령관을 다방에 혼자 남겨놓고 김종신 기자는 회사로 달려가 마 감시간을 3분 넘긴 특종을 했다.
박정희는 유언비어 날조와 유포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5일부터 언론 검열을 부활시켰다. 5월6일 경남지역(당시 부산은 아직 직할시로 독립하기 전이라 경남도 소속) 여야 국회의원들은 국회 해산과 기성 정치인의 퇴진을 요구하는 부산시위에 위협을 느끼고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날 허정 내각수반과 이종찬 국방장관, 그리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국 회로 불러 '부산 시위는 조총련계가 남해안으로 침투하여 사주하고 있다 는 설이 있 다'면서 대책을 따졌다. 일부 의원들은 '조총련이 10억환의 음모자금을 대고 있고 군의 유력한 장성이 이 시위를 묵인하고 있다'고 박정희를 겨냥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