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
이즈음 군사혁명을 꿈꾸던 박정희, 김종필 등 장교들이 유심히 관 하고 있던 사태는 터키의 군부 쿠데타였다. 5월27일 터키 군부는 멘데레 스수상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멘데레스 정부는 야당과 언 론을 탄압하다가 학생들의 시위를 불렀다. 이 학생들이 한국의 4·19혁 명에 자극받았다고 하여 우리 신문들은 터키 사건을 크게 보도해 왔었다.
언론은 대체로 터키 군사혁명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전했다. '터키의 학 생들과 시민들이 군대를 열렬히 환영하고 군대는 폐쇄된 대학과 신문사 의 문을 다시 열게 했으며 경찰력을 무력화시키고 구집권세력을 소탕하 고 있다'는 요지였다. 이런 보도는 4·19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국군 장교들을 고무시킬 만한 것이었다.
5·16 주체세력은 이집트의 나세르 등 외국의 군사혁명 사례를 참고 로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케말 파샤에 의한 터키의 근대화 혁명을 많이 연구했다. 당시 우리 언론이나 장교들이 터키 군부의 역할에 대해서 간 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터키 군부는 헌법에 의해서 '케말리즘의 수호 자'로 지정되어 있다. 케말리즘의 핵심은 정교분리, 남녀불평 폐지등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적 근대화 이념이다.
한때 회교권의 종주국이었던 터 키가 회교원리주의자들로부터의 도전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서구지향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군부가 케말 파샤의 근대화 이념의 수호자 로서, 또 국정의 감시자로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는 정부가 케 말리즘을 위반한다고 판단하면 합헌적인(헌법이 군대에 케말리즘의 수호 를 의무화하고 있으므로) 개입을 통해서 정권을 갈아치우곤 한다. 따라 서 터키 군부의 거사는 쿠데타나 혁명으로 부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영희 총장이 취임한 지 한 달쯤 뒤 김종필, 석정선 두 중령이 청파 동의 사저로 찾아왔다. 최영희의 기억에 따르면 두 8기 중령은 '나라가 이렇게 혼란해서야 되겠습니까.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대가 가만 있 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라고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말 을 했다고 한다. 최영희 장군이 8사단장 시절, 자신의 밑에서 특공대장 을 했던 박창암 대령도 찾아와서는 격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다.
이들에게 최 총장은 '군대는 민의를 따라야 한다. 아직 민주당 정권이 출범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나무란 뒤 돌려보냈다. 방첩대로부터는 '박정희 장군 중심으로 장교들이 심상치 않는 움직임을 보이 고 있다'는 보고도 더러 올라왔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입 밖에내지도 못 할 이야기들이 군인들의 입에서 함부로 나와도 달래기에 바쁜 시대상황 이었다.
1960년 7월 하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출입기자와 참모들을 데리 고 부산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기 자들은 과묵하고 딱딱한 박정희가 노래를 잇달아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 다.
박정희는 느릿한 '낙화유수'를 주먹을 흔들면서 군가식으로 바꾸어 불렀다. 참모들이 '하나, 둘, 셋'하면서 장단을 맞추어 배꼽을 잡게 했 다. 박정희는 둥근 방석을 머리에 이고는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더니 '안 남춤'이란 걸 추기도 했다. 박정희는 원래 술자리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 진듯 상하관계를 무시하고 풍류와 흥에 겨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인데 기 자들에게는 이것이 뉴스였다. 박정희가 육본으로부터 인사발령을 전해 들은것은 이 자리에서였다.
7월28일자로 광주에 있는 1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백한 좌천이었다. 울적해진 박정희는 이날 인 사불성일정도로 술을 마셔 부하들에게 업혀나갔다. 다음날 부산일보에 김종신 기자가 쓴 '4·19와 박정희장군'이란 제하의 기사는 '부정부패한 장성들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영관급 장교들 의 지지와는 역비례적으로 고급 장성들은 박 소장을 눈 아래 혹으로 생 각했다'고 보도했다.
최영희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군수뇌부와 미군에서 박 장군에 대한 말들이 많아 내가 그를 전보시켰다'고 말했다. 자신은 비록 박정희의 정 군론에 동감하고 있었지만 그를 계속 부산에 두는 것은 지휘체제에 혼란 을 부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이종찬 총장, 허정 수반,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까지도 군대를 안정 시켜야 할 때이지 정군할 때가 아니란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박정희는 인사참모 박태준 대령을 1관구 사령관의 참모장으로 데려가 려고 했다. 그런데 장도영 2군사령관이 박정희에게 '지금 참모장은 내가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계속 써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 았다. 박태준 대령은 후임 군수기지사령관 박현수 소장이 '같이 일하자' 고 붙드는 것을 마다하고 두번째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관구 사령관 박정희를 따라 광주로 간 참모는 윤필용 중령이었다. 이부대는 예산이 부족해서 장교들의 회식도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어 느 날 사령관 전속부관 김성구 대위가 전화를 걸어 윤 중령에게 '사령 관께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신다'고 했다. 사령관 있는 데로 갔더니 박정희는 부사령관, 참모장과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윤필 용이 나타난 것을 힐끗 보더니 '웬일이야'라고 했다. 윤 중령은 찾는다 고해서 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박 소장은 윤 중령을 합석시키더 니 술과고기를 권했다. 한참 술잔이 돌아 거나하게 취하자 박정희는 부 사령관을 보면서 말했다.
'실은 내가 윤 중령을 오라고 했소. 나를 따라다니는 이 친구가 데 려온 자식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윤 중령은 그 말에 눈물이 핑 돌더라고 한다. 윤필용은 기자에게 이 런 말을 했다.
'청년장교들이 박 장군을 따랐던 이유는 그 분이 나라 걱정을 많이 하고 부하들을 골육의 정으로 사랑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밥주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를 가장 좋아하는 식구를 따른다 고 합니다. 한번 그분의 부하가 되어본 많은 장교들이 심복이 되었습니 다.'.
내각제로 개헌이 이루어진 뒤 치러진 1960년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2백19개 선거구 가운데서 1백72명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다. 압도적 지지를 받은 민주당이 단결만 했더라면 정치적 안정과거기에 바탕한 경제발전도 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간선된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은 국무총리 후보에도 구파 김도연 의원을 지명했다. 이에 반발한 신파가 국회인준 투표에서 부결시 켜버렸다. 할 수 없이 윤 대통령은 신파의 장면 의원을 총리후보로 지 명했는데 구파가 반발, 겨우 10표 차이로 인준되었다. 이념이 아닌 인맥에 따라 파당적 분열상을 보이고 끝내는 분당으로 치닫게 되는 민주 당의 사정은 사회 혼란과 5·16을 부르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