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중장의 반격
송요찬이 육군참모총장 사퇴의사를 발표한 뒤 최영희(유정회회장, 국방장관 역임) 중장은 김종오 참모차장, 유재흥 1군사령관, 장도영 2군사 령관 등 군사령관급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여 군의 진로를 의논했다고 한다. 최영희 장군의 최근 증언.
'저는 4·19혁명의 영향이 군대에 미칠 것이니 우리 같은 사람이 물 러나든지, 아니면 불평분자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 회의에 서는 유재흥 장군을 후임 총장으로 건의하기로 했고 이종찬 장관에게 그 렇게 보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재흥 장군이 스스로 물러나자 장관과 허 정 수반은 저를 불러서 총장직을 맡으라는 겁니다'.
5월23일 최영희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그에게 '정군운동의 구심점인 박정희 소장을 육본 인사참모부장으로 기용하면 청년장교들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영희 총장은 박정희를 불렀 다. 그리고 '내가 인사에 관한 전권을 줄테니 양심적 인사를 발탁하여 군 내를 쇄신해보라'며 인사참모부장직을 제의했다. 박정희는 사양했다. 이 를 두고 5·16주체들의 기록에는 '최영희로서는 과감한 정군을 기대하기 어려워 거듭된 요청을 거절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최영희 장군은 '어 떻게 하급자가 쉽게 응낙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겠나'면서 '박 장군은 송 요찬 장군에게 보낸 편지사건도 있고 해서 영전으로 비쳐지는 그런 인사 제의에 겸양한 태도였다'고 회고했다.
최영희 총장은 5월27일 최임소신을 밝히는 자리에서 '군을 혁신하는 입장에서 하급 장교들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겠지만 개인 감정으로 상관 을 모략중상하는 일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취임 1주일 쯤 뒤초도 순시차 부산으로 내려와 군수기지사령부를 찾았다. 기자회견이 있었다. 박정희는 최 총장에게 다가가더니 '각하, 요즈음 눈병이 나서 안 경을 끼었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박정희는 두 발쯤 물러나서 팔짱을 끼고 최 총장의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30분간 계속된 기자회견 이 끝날 무렵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물었다.
'정군을 주장하는 장교들이 있는데 수습을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시종 웃는 얼굴로 답변하던 최 총장의 안색이 변했다.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자가 바로 군의 이간 을 책동하는 불순한 자란 말이야. 앞으로 그런 자는 용서없이 처벌하겠 어.'.
'바로 그 자'는 박정희를 지칭하는 것처럼 들렸다. 입을 꽉 물고 있 던 박정희의 담배를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 항상 그랬듯 박정 희의 턱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 총장은 '용서 없이 처벌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다. 박정희를 찾아간 김 기자가 '말썽 을 만들어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괜찮아. 뭐 못할 소리했나'면서 넘겨버렸다.
이 무렵 과도정부는 '생활 간소화'란 구호를 내걸고 허례허식을 배격 하자는 운동을 펴고 있었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고관들이 부대를 시찰 올 때는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간소한 접대를 하고 있었다. 국방차관이 내려 왔는데도 공항영접과 사열을 생략하고 그냥 사무실에서 부대 현황을 보고 했다. 차관 일행이 예하부대 시찰을 떠날 때는 문 밖에서 인사를 하면서 차관에게 아리랑 담배 한 갑을 주더라고 한다. 옆에 있던 기자가 너무 소 홀한 대접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내 할 일을 하면서 손님을 접대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이 일 을 하기 위해서 순시를 나왔다면 나도 내 할 일을 해가면서 접대를 해야 지.'.
박정희는 강직하지만 경직되지는 않았고 엄격하지만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한 기자는 '그는 딱딱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부드러운 속살을 가 진 조개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6월9일 최영희 총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육 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과 김형일 2군단장은 격론을 벌였다. 당시 박정희 아래서 공보실장으로 있던 이낙선 소령이 기 록한 '정의의 수난'에선 박정희가 소장 이상 장성들에 대한 숙정을 주장 하고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는 '과도정부 하에서 군의 처우 개선과 군 내부의 정치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자정작업 없이 신정권으로 넘어가면 군은 또 다시 정치의 시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군 수뇌부를 겨냥한 박정 희의 주장에 청렴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김형일이 반발했다.
'오늘날 군의 잘잘못은 모든 장교들의 공동 책임이다. 군인도 인간인 이상 봉급만으로 생활하지 못한 것은 하사관부터 대장까지 마찬가지이다. 하사관들은 반합으로 도식하고 장교들은 가마니로나 후생사업으로 살아왔 다. 그런데 부정축재한 사람은 다 나가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하 면 하극상이 만연되어 군은 자멸한다'.
두 사람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이종찬 국방장관은 김형일 장군편 을 드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4·19는 혁명이 아니라 정변이다. 이 정권 시대의 법도 법이었다.요 사이 군과 관련된 거창사건 등의 재심을 주장하는데 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3·15부정선거 때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제 와서 부정선거를 강요한 자는 자진 사퇴하라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4·19 이후 군대를 신경쓰게 만든 것은 전국적으로 번진 양민학살 폭 로 시리즈였다. 5월11일 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선 9년 전인 동란 당시 에 일어났던 학살 사건의 유족들이 당시 면장 박영보(54세)를 붙들어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 면장은 1951년에 군인들이 7백여명의 마을 사람들을 공비협조자로 몰아 학살하는 데 협력했다고 해서 신원면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피학살자 유족들이 몰려와서 '우리가 죽였으니 다 잡아가라'고 하는 바람에 주동자를 가리기도 어려웠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많은 고급장교들 의 눈에는 박정희의 군 숙정론이 이런 유의 시세에 영합하는 행동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의 인기는 주로 영관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