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 5개년계획안
10월8일 서울지방법원은 3·15부정선거에 관련되어 구속기소되었던 곽영주 전 대통령 경호책임자 등 피고인들에 대해서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선고, 석방했다. 그 3일 뒤 4·19 부상학생 들이 문제의 판결에 항의한다면서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본회의는 중 단되고 국회의원들은 피했다. 부상자들은 의장단상을 점령하고 목발로 단 상을 치면서 난동을 부렸다.
'너희들은 다 나가라! 우리가 정치를 하겠다.' '정쟁 국회는 해산하라!'.
곽상훈 국회의장은 사임서를 제출하고 내무장관이 물러났다. 국회는 소급입법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소급입법의 전통은 5·16 후와 5·17(1980년) 후 정치인을 규제할 때, 그리고 1996년 전두환, 노태 우 전 대통령을 처벌할 때도 되풀이되었다.
장면 정부를 무능하게 보이도록 한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언론의 무책 임한 정부 난타였다. 장면 총리는 얻어맞으면서도 주례 기자회견을 계속 했다. 20대 총각 기자가 맨 앞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질문을 던지는데 담배연기가 60대 총리의 얼굴에 사정없이 뿜어졌다.
당시 장면 총리의 공보비서는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 송원영. 그는 '마치 언론자유는 장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 언론이 민주 정권을 독재정권보다도 더 가혹하게 두들겼다'고 개탄했다(송원영 씀 '제 2공화국').
<당시 언론기관이 얼마나 막강했는가는 장면 내각의 제1차 국무회의에 서 기자단 대책을 논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홍익표내무장관은 '기 자단에서 총회를 한다면서 협조를 요청하는데 얼마나 내면 좋겠는가'고 문제를 제기했다. 말이 기자단 총회이지 그것은 걷은 돈을 나눠 가지는 모임이었다. 그런 총회가 1년이면 다섯, 여섯 번씩 있었다.> 국영방송 KBS도 정부 공격에 가담했다. 송원영이 어느 날 라디오를 들으니 프로 진 행자가 한다는 말이 '춥고 배고픈데 음악은 들어서 무엇하느냐고요? 글쎄,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방송국장에게 항의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서울일일신문엔 연재만화에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란 글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 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장씨종친회에서 장면 총리와 입원치료 중 일본으로 달아난 자유당 실세 장경근이 장씨란 점에서 창피해서 견딜 수없다는 만화였다. 총리와 3·15부정선거 사범을 같이 취급하는 태도에 격분한 송원영은 이관구 사장을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 사장은 '쯧쯧… 이건 너무 했는 걸!'하면서 윤전기를 세우게 하더니 만화를지워주었다.송 원영은 'KBS, 서울신문, 그리고 장면 총리와 가깝던 신문까지 시류를 따 라 총리를 공격하니 장 총리는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고 썼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국가건설을 위한 몸부림은 이어지고 있었다. 9월 장면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부시책으로 실시하겠다고 발표 했다.
부흥부의 이기홍 기획국장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 시절 산업개발위원회 에서 작성한 적이 있는 경제개발3개년계획안을 기초로 하여 계획수립에 착수했다. 자유당 때 성안된 장기경제개발 계획안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 통령은 '아니 불구대천의 원수 스탈린의 방식을 따르자는 것인가'라고 힐 책하여 이 계획은 묵살되었으나 이기홍, 이한빈(당시 재무부 예산국장) 같은 미국 유학파 경제관료들은 하나의 불씨처럼 그 꿈을 간직해오고 있 었다.
장면 정부는 5개년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재정지원을 미국에 요청했다. 장면 총리는 '원조요청각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면서 내정 개혁의 단행, 국방비 부담의 축소, 대일국교정상화를 약속하고 1961-65년 간 소요될 4억2천만달러의 지원을 요청했다. 10월 초엔 김영선 재무장관 이 미국을 방문, 직접 설명에 나섰다. 김영선 장관을 수행했던 당시 예산 국장 이한빈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귀로의 비행 기안에서 김영선 장관은 이 국장에게 '혹시 박정희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한빈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김영선은 '워싱턴에 있는 동안 어떤 미국 인사가 '그 사람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귀띔 을 해주더라'고 했다. 이한빈은 하도 어마어마한 이야기라서 그냥 듣기만 했다.
5개년계획을 만들면서 정부는 미국 아시아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미 국방부의 연구소인 랜드 코포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찰스 울프 박사를초청, 자문을 받았다. 울프 박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부흥부 이 기홍 기획국장과 이한빈이었다. 울프는 '5개년 계획은 국방을 포함한 장 기적인 국가경영전략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어서 작업은 내실 있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이한빈 회고록 '일하며 생각하 며') 이기홍 국장은 1960년10월 수색의 국방대학원에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 '국토건설사업' '미국 원조의 효율적 운용방 안' 등을 주제로 하여 세 차례 강의를 했다. 그는 장교들의 의욕과 진지 한 자세에깊은 감명을 받았다. 강의가 끝나면 교수요원들이 심도 있는 질 문과 토론을 이어갔다. 이기홍 국장은 '이 젊은 장교들이 왜 이처럼 열성 적인가 하고의아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민간 동료 공무원들은 5개년 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에 무관심이거나 냉소적이었는데 오히려 군인들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이 었습니다. 교수부 장교들은 강의 준비상 필요하다고 사무실과 집으로까지 찾아와서 질문하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강의 주제엔 들어 있지도 않았던 경제개발부 창설안에 대해서도 물어보곤 했습니다. 이들 장교 대부분이 5·16이후 최고회의와 기획위원회에서 활약했습니다.'.
이기홍 국장이 기획하여 실시한 것이 국토건설 사업이었다. 실업자 구 제, 미국 원조 양곡, 그리고 낙후된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연결시킨 발상 이었다. 식목, 치수사업, 도로 건설에 인력을 동원하여 그 대가로 밀가루 등 양곡을 지급하는 사업의 규모는 1천만달러 가량의 미국 원조물자를 포 함한 총 4천만달러 정도였다. 이 사업의 핵심요원으로 쓰려고 대학졸업생 들을 대상으로 국토건설대원들을 모집했다. 2천66명을 뽑았다. 이 발상은 김영선 재무장관이 낸 것이다. '4·19의 젊은 정열을 새 시대에 흡수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