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루더 사령관
군부가 김종필 중령 등 8기생 장교들이 제기한 정군 문제로 시끄럽던 9월10일 최경록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후속 인사에서 1관 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불러올렸 다. 이 직후 박정희가 남긴 두 편의 글이 있다.
박정희는 편지를 많이 쓴 사람이다. 대통령에 있을 때도 그 바쁜 일정 속에서 수많은 사신을 보내 받는 이들을 감동시키기 도 했다. 그는 지위의 고하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꼭답 장을 했다. 1960년 9월23일 박정희가 부산 영남상업고교 이동 룡 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예이다. 이동룡은 4·19혁명 때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이승만 하야 뒤의 혼란기에 박정 희 계엄사무소장의 지시에 따라 질서유지에 협력했다. 그가 박 정희에게 편지를 보낸 데 대한 답장의 요지는 이러했다.
<형들의 힘으로 성취한 4·19혁명은 이 나라, 이 겨레에 강 심제를 놓고 활력소를 주입케 한 역사적인 혁신이었습니다. 혁 명의 격동기에 형들과 동일한 공간성에 처재하였고 호흡을 같 이 했다는 것을 생애를 통해서 잊지 못할 인연이자 본인의 영 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10일자로 다시 육 본으로 전속발령을 받고 지금은 감군문제 등 복잡한시기에 본 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에 오시는 기회가 유하 시면 필히 왕방하여 주심을 고대합니다.>.
이 편지를 쓴 6일 뒤에 박정희가 자신의 잡기장에 쓴 글이 전한다.
<만사가 이대로만 순환하고 진전이 없다면 명일의 사회는 여하히 될 것인가. 사월 혁명에 선혈을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찾으려고 선두에 서서 젊은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학도들 이 또다시 거리에 나와서 생활계몽을 호소하고 기성인들의 경 각을 부르짖었다. 정열과 반응이 없는 사회의 무신경함에 너무 나 안타까운 나머지 왕왕이 탈선도 한다. 이 나라의 지도층을 자처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근자의 무절제하고 몰지각하고 파렴 치한데는 통탄을 불금한다.
대중은 신생 제2공화국의 혁 신적인 시책과 국민생활 향상을 위해서 지대한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관망하고 있다. 연이나 정국은 난마와도 같이 헝크러지 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 만 커가고 있다. 난하면 악한 놈이 득세한다는 옛말대로 이 정 권 하에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가도가도 시관이 보이 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 의 문란 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질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 엇일까. 공산당의 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 회 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 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 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 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이 무렵 쓰여진 박정희 측근 이낙선 소령의 잡기장 속 잡문 도 정군파 장교들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조국아! 당신은 영영 시들려나. 이 나라를 구하는 길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장면씨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 니 회심대오하여 사심을 버리고 솔선수범을 하고 나서 일대 혁 신정책을 쓰는 방법. 둘째, 군에서 일대혁신을 단행하여 국민 에 모범을 보이고 비정하는 정부를 강압적으로 시정시키는 방 법. 셋째, 혁명으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 이상 세 가 지 방법에서 첫째 것은 장면씨에게 새로운사람이 되어달라는 것인데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둘째 방법에는 군의 지휘관들중에 앞장 서서 대담하게 일할 사람이 없다. 그 들도 정부 고관과 다름 없이 썩었다.
썩지 않은 장군에게는 참 모총장직을 맡길 리가 없다. 셋째 방법만이 한국의 살 길이다. 그리고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 학생들도 이젠 그들의 무기력을 노정시키고 말았다.혁 신계는 공산화할 위험이 있으며 족청계는 사심이 너무 크다.충 성무사(어느 정치계열에도 속하지 않는)한 군인이 혁명을 일으 켜 일정한 기간 군정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만들고 건설은 지 자에 넘겨주도록 해야 한다.>.
1960년 가을 박정희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 다. 우리 군수뇌부와 미8군은 그를 김종필 중령이 주동한 이른 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더 구나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의 해묵은 좌익 전 력을 문제삼아 예편시키려고 했다. 박정희는 16인 사건(최영희 연참총장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연행된 사건)과는 관계가 없 었다.
김종필 중령은 처삼촌이 오해를 받을까 하여 이 무렵 일 부러 박 소장을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미군측에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박정희를 예편조치하라는 압력을 장면 정부에 넣었다. 매그루더 대장은 직접 현석호의 후임인 권중돈 국방장 관과 최경록 참모총장을 만나 그런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미 군은 한국군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군파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데 불안을 느끼 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히 박정희의 좌익전력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한국군에선 6·25전쟁을 통해서 입증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사상문제에 대해서 관대한 미군 측에서 오히려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영선 재무장관이 미 국을 방문했을 때 국방부 고위 관리가 박정희를 거명했다고 한 다.
'한국군의 작전참모부장은 공산주의자다. 체코슬로바키아도 공산화되기 전에 육군의 작전국장이 빨갱이였는데 그 사람이 주동이 되어 국가 전체를 공산화시켰다. 만약 한국 정부가 박 정희 소장을 그 자리에 둔다면 우리는 원조를 재고하겠다.'.
김영선 장관은 귀국한 뒤 장면 총리에게 이런 말을 전했고 장 총리는 최경록 총장에게 미국측의 뜻을 알려주었다(이낙선 의 '정의의 수난').
매그루더는 1960년 11월18일 최경록 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 내 '현재 군법회의에 넘어가 있는 16인 항명사건을 엄격히 다 루고 그 선동자들을 조종한 장군 두 명을 군에서 제거한다면 미 국방부의 태도는 한국측에 유리하게 바뀌어질 것이다'고 했 다.
'조종한장군 두 명'으로 지목된 것은 박정희와 인사참모부 장 박병권 소장이었다. 박정희 소장의 직속부하는 공교롭게도 1948년 특무과장으로서 숙군수사를 주도했던 김안일 준장이었 다. 작전참모부 차장이던 김 준장은 미군측에서 박정희 작전참 모부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불시에 미군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한국방어계획 문서를 점검하는 것이 무슨 약점을 잡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