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의 구원
'5·16혁명사'의 기초가 된 미공개 자료집 '혁명 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11월9일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신당동 박 소장 집 응접실에 모여든 젊은 그들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마저 풍기는 여유가 보였다. 박 소장이 자기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혁명계획을 확인한 9명의 장교들 앞에서 그들의 장거를 적극적으로 찬동 하는 뜻을 밝히고 함께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재건에 있는 힘을 다하자 고 다짐하는 훈시로 모임은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
'…오직 악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 애국애족하는 청년장교들의 단결만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군 수사기관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지만 모든 책임은 나 한 사람이 지겠으 니 여러분은 맡은 부서별로 열과 성을 다해주기 바란다.'.
숨가쁜 회합을 파하고 이어 박 소장의 요청으로 일행 10명은 깊어가 는 가을밤이 아쉬운 듯 소공동 화식집 '남강'으로 향했다. 투명한 술잔 을 들고 말없는 맹세를 되뇌이며, 또한 내일을 모르는 푸른 생명을 술의 낭만 속에 파묻고 싶은 심경이었을지 모른다. 가을밤은 깊어만 갔다. 뒷 그림자만 남기고 흩어져가는 그들의 이름은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길 재호, 옥창호, 김동환, 정문순, 신윤창, 우형룡 중령 등 육본의 중견장 교들이었다.>.
육사8기 장교들과 박정희가 처음으로 만나 혁명을 다짐했다는 이 모 임은 그 뒤 여러 기록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데 이 모임의 실재는 의 심스럽다. 우선 김종필 총리서리가 '그런 모임이 그때 없었다'고 부인하 고있기 때문이다. 그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적혀 있는 오치성도 '박 장 군과 우리 장교들이 한 자리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했다. 5·16 후에 일부 문필가들이 거사 모의를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란 이야기가 많다. 오치성은 이런 증언을 했다.
'우리 아홉 명이 처음부터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기로 작정하 고 혁명을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영관장교들의 힘만으로써는 혁명이 성 사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한 뒤 누구를 지도자로 모실 것이냐로 토 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거명된 인물이 박정희, 박병권, 그리고 한 신 장군이었습니다. 한신 장군은 그냥 한번 언급되고 넘어갔고 본격적으 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두 박 장군이었습니다. 김종필 중령이 박정희 장군을 추대하자고 말을 꺼냈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동료들이 많았습니 다. 우리 가운데는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본능적으로 공산당을 싫어하는데 박정희 장군이 한때 좌익과 연루되어 옷을 벗었던 사실을 아 는 우리로서는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종필 중령이 역시 아주 슬기롭게 대처하더군요. 그가 박정희 장군의 조카사위인 것을 우리 는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김종필 중령이 박 장군을 추대하 자고 고집을 피웠더라면 우리는 정실에 흐르는 처사라고 하여 김 중령을 불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 중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의견이 다르니 우선 시간을 갖고 박 장군에 대해서 알아본 다음 에 다시 모이지.
그 뒤 며칠간 우리는 박정희 장군에 대한 평판을 수집하러 다니면서 일종의 신원조회를 해보았습니다. 한결 같이 '깨끗하고 능력있는 분'이 란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는 자연스럽게 혁명지도자로 박정희 소장을 추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더군요. 그 뒤 박정희 장 군과의 접촉은 김종필 중령에게 맡겼기 때문에 박 장군의 집에 우리가 몰려가서 회합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1960년 12월8일 육본작전참모부장 박정희 소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2군 사령관은 장도영 중장. 장도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마침 부사령관이 논산 훈련소장으로 전출되어 공석 이되어 있었는데 박정희 소장이 예편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 다'고 했다. 1950년 6월 장도영 당시 육본 정보국장은 인민군이 서울로 밀고 들어왔는데도 전투정보과의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가 월 북하지 않고 한강을 건너 국군과 합류한 것을 보고는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풀게 된다. 그는 상부에 건의하여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직시켰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장도영 장군은 그 뒤 두 번 박정희를 직속부하로 쓴 적이 있었다. 선한 심성을 가진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가 예편당하게 되 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동정심이 발동하여 다시 한번 구원의 손길을 뻗친 다.
'그는 전시 근무를 거쳐 장성으로 승진했는데 확고한 증거도 없이 좌 경 위험인물이라고 낙인을 찍어 예편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 한 나는 육본에 연락하여 마침 부사령관직이 공석이니 박장군을 2군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도영보다 여섯 살이 위였다.
장도영은 부하이지만 박정희를 어렵게 대했다. 부사령관으로 부임해온 박정희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려고 장도영 중장은 애쓴다.
미국에 갔다가 미국 정부 요인으로부터 '박정희를 예편시키라'는 압 력을 받고 돌아와서 장면 총리한테 전달한 바 있는 김영선 재무장관은 당시장면 내각의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이 센 장관이었다. 장도영은 김영 선 장관과 박정희를 식사 자리에서 만나도록 해 구면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영선은 박정희 정권 때는 주일 대사로 중용 되었다. 이 무렵 장도영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이러했다.
<그는 원래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언행에는 선적 가치관이 내재해 있었다. 과묵하고 매서운 눈으로 항상 앞을 직시하며, 똑바른 자세로 절 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몸가짐은 얼핏 보면 일본의 무사를 연상케 했는데, 흠 잡을 데 없는 전형적 군인이었다. 그러나 평소 그 얼 굴에는 수심이 끼여 있었고 욕구불만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간혹 웃을 때도 종종 냉소적인 표정을 띠었다. 그 냉소는 군에서 그를 오해하 거나 부당한 처우를 하는 데 대한 반발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 냉소는 부패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그가 보고 있던 우리 사회를 비판또는 백안시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가 별로 없었다. 상하관계상 자신을 존경하는 추종자는 있었겠지만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친구가 되고 상호신뢰와 존경으로 협조하여 공동 목표를 달성한다는 개념은 많이 결여되었던 것 같다. 이런 점은 그가 흉 금을 터놓고 자기 자신을 노정하지 못하는 성격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모 르나 그보다는 그의 비범한 영웅심이 사회생활에서 자기 소외를 가져온 것으로 나는 보았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