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극복해야 할 두 사람은 5·16당시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과 총리 장면이었다. 두 장씨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둘 다 정치적이었지만성격이 온 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회에선 좋 은 관리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난세에서 박정희와 같은 간웅을 만나면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박정희는 혁명모의와 실행과정에서 장도영 을 이용하여 장면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썼다. 두 장씨를 한꺼번에 보내 버리는 방법이었다.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나와 박정희의 다른 점'을 언 급했는데 이는 장도영과 같은 인간형이 왜 박정희한테 당할 수밖에 없었 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나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청소년 학도시절에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공부한 일도 없고, 자율 과 자제도 많이 부족했던 것이 나의 생활 모습이었다. 나는 규율과 단련이 결여되었다. 박정희 장군과 나는 상통하여 친밀해질 수 있는 요소도 있었지만 대조적인 요소가 더 많았다.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육군의 육성방안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나는 미군에서 본을 따서 우리에게 맞게 적응해나가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일본군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의 편제와 훈련 교육에 관한 논의가 나오면 일본군대에 관한 예를 많이 들었다. 그는 또 술을 좋아했 다.
술 마시고 울분을 토하고 그의 무인기질과 영웅심을 적나라하게 나타 내곤했지만 나는 술이 몸에 맞지 않아 많이 못하고 또 호언장담도 할 줄 모르는 성품이라 한 부대에서 같이 근무하면서도 허물없는 술좌석을 같이 해본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물욕적 부패를 혐오했고 청빈을 군인의 자 랑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계를 가깝게 한 것은 그에 대한 나 의 깊은 동정이었다.>.
박정희는 사람 좋은 이 장도영 장군을 바람막이로 이용한다. 박정희 는 대구에서 자주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그는 청계천변에 있는 단골 요정 '봉우리'에서 김재춘 6관구 참모장을 불러냈다. 박정희는 교제범위 가 넓고 활달한 김재춘 대령에게는 마음 편하게 대했고 생계나 돈과 관련 한문제로 신세를 많이 졌다. '봉우리'에서 박정희는 술을 마시곤 항상 외 상으로 달아두었는데 이것을 갚는 것은 김 대령의 몫이었다. 이날 박정희 는 김재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혁명을 하는 데는 장도영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앉혀야 유리 해. 참모장이 정계에 힘을 한번 써봐.'.
김재춘이 듣기엔 장도영 장군도 이런 로비에 대해서 허락을 한 것 같 았다. 김재춘은 박정희 2군사령관과 이주일 참모장이 함께 장도영2군사령 관을 설득하여 참모총장 추대공작을 하는 데 양해를 얻었다고 본 것이다. 김재춘은 서울지구를 관할하는 6관구에서 참모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여 정치인들을 많이 알았다. 그는 우선 명동 메트로 호텔 안에 있던 민주당 의 실력자 오위영 의원을 찾아갔다. 김재춘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는 군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장도영 장군이 책임감이 강하고 소신이 있습니다. 참모총장으로 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오위영 의원은 군내사 정엔 어두웠고 김재춘의 말을 믿었다. 그는 '장 장군을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1961년 1월 김재춘의 연락을 받은 장도영 2군사령관은 대구에서 군용 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전속부관 김동수 소령을 데리고 왔다.김 재춘은 장도영만을 안내하여 오위영 의원을 찾아갔다. 장도영 장군은 모 자를 벗더니 오위영에게 큰 절을 했다. 오위영 의원은 점잖게 물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군 창설 당시부터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전번 4·19혁명 때 우리 군은 중립을 잘 지켜주어 얼마나 고마웠는 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군이 중심이 되어 이 난국을 잘 끌고나가야 할 텐 데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군을 잘 결속시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참모총장 물망에 오르고 있는 모양인데 참모장 이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이렇게 뵙게 된 것입니다.'.
며칠 뒤 오위영 의원이 김재춘을 부르더니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아무래도 장면 총리는 여러 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것 같은데… 박 순천 의원 알지요? 그 분한테 한번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장 장군도 모시 고 가서 선을 보이시지요.'.
김재춘은 장도영을 모시고 서대문구에 있던 박순천 의원 집을 찾아갔 다.
박순천 의원도 인상이 좋은 장도영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장면 총리 에게 장도영을 총장으로 추천했을 것이라는 게 김재춘의 추측이다. 장면 총리가 장도영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데 있어서 오위영, 박순천 두 의 원의 말을 어느 정도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재춘에 의한 '운동'이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당시 국방장관은 현석호.
장면 1차 내각의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한 달도 못되어 물 러났던 현석호는 1961년 1월30일 민주장 내각의 제3차 개각 때 다시 국방 장관으로 기용되었다. 현석호는 16인 사건 등 이른바 하극상 사건으로 어 수선한 군 내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선 최경록 총장을 바꾸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장면 총리한테 건의하니 장면 총리도 동의해 주었다.
현석호 장관은 우선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 다.
이승만 정부 때부터 육군참모총장의 인사에 대해선 미8군 사령관과 사 전에 협의를 해왔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불과 몇 달 전에 최경록 장군을 총장으로 임명했는데 왜 또 바꾸려고 하는가'하고 반대했다. 현석호 장관 은 '현 시점에선 과단성 있는 총장이 있어야겠다'면서 '나는 우리 군 장 성들의 성분과 능력을 잘 모르니 사령관이 추천하는 대로 쓰겠다'고 말했 다. 그랬더니 매그루더의 태도가 누그러졌다고 한다. 현 장관은 김종오 연참총장, 이한림 육사교장, 장도영 2군 사령관을 거명했다. 매그루더는 대뜸 '제너럴 장이 어떨까요'라고 했다. 현석호 장관은 장도영에 대한 선 입견이 있어 선뜻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장 장군은 자유당 때 이기붕, 박 마리아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소 문이 있었다. 심지어는 이기붕씨의 양자라는 구설수가 많았다. 그러나 과 거 일은 어쨌든 현재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는 매그루더의 추천에 즉각 동의하였다.>(회고록 '한 삶의 고백').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