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군복 벗다
헌병대 감방에서 수염이 검게 자란 김종필 중령에게 조흥만 헌병감이 말했다.
'자네, 자진해서 사표를 내주어야겠어' '못냅니다. 군법회의에 넘기십시오. 법정에서 남길 말을 다하고 나가겠습니다.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다 털어놓겠습니다.'.
'지금까지 자네들이 저지른 일들은 다 군을 사랑해서 한 것 이라고 이해를 하네. 그래서 많은 선배 장군들이 군복을 벗고 나간 것 아닌가. 이제는 정군 문제 같은 것은 총장님에게 맡기 고 군대가 조용해져야 돼. 그러니 자네가 나가주어야겠어. 그 러면 이 사건도 불문에 붙이겠어.' '그래도 못냅니다.'.
'그러면 박정희 장군이 편치 못하게 되네. 너희들이 박 장 군을 엎고 혁명한다면서….' '한번 알아보십시오. 제가 지금 여기 들어앉아 있는 것도 모르시고 있습니다.'.
'내가 부하들을 다 동원하여 뒤지면 얼마든지 박정희 장군 을 집어넣을 수 있어. 자네가 정말로 박 장군을 존경한다면 조 용히 군복 벗고 나가. 자네만 나가면 박 장군 문제도 덮어두겠 어.'.
김종필은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40분 생각해 보다가 그는 사표를 쓰는 길을 선택했다. 1961년2월15일 김종 필과 석정선중령은 자진예편 형식으로 13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김종필이 감방에서 풀려나 집에가니 동기생들이 와 있 었다. 그들에게 김종필은 '이제는 시간이 많을 테니 좀 뛰어다 녀보겠어'라고 했다. 닷새 뒤인 2월20일 김종필은 형 김종락에 겐 '삼촌한테 가서 용돈이나 뜯어와야겠다'고 말한 뒤 대구로 내려갔다. 조카사위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깜짝 놀랐다.
'이거 안 되겠군. 이래 가지곤 안돼. 나도 결심을 할 때가 된 거야. 그동안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보고 나 대로 준비는 해왔어. 서울 사정은 어떤가.' '서울 주변에 있는 예비사단을 동원할 정도는 되어 있습니 다.'.
'나도 전방의 2개 사단 정도는 동원할 수 있도록 해놓았어. 조용히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김종필 총리서리는 자신의 예편이 5·16 준비를 본격화시켰 다고 말한다.
군복을 벗으니 홀가분한 마음에서 거사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전에는 구상 단계였고 사실상의 준 비는 내가 군복을 벗고 뛴 석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고 말 했다. '5·16은 나의 작품'이란 자의식이 강한 김종필의 이런 시각에 대하여 박정희 측근에선 '5·16 때 서울로 들어온 해병 대, 공수단, 6군단 포병단, 5사단 병력은 모두 박정희 장군이 직접 포섭한 부대였다'면서 '박정희의 충실한 작전참모로서의 김종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박정희가 말한 '동원 가능한 전방 2개 사단' 중 하나는 채 명신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이었다. 채 준장은 박정희 가 육사 중대장일 때 생도였고, 1군 참모장일 때는 그 밑에서 작전참모로 있었다. 개혁엔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채명신은 5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이비 기자들의 등살에 시달리면서 시대 의 모순에 울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당시 영외거주를 하는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땔감을 사는 데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채명신 사단장은 일요일엔 전장교, 하사관들을 부부동반으 로 집합시켜선 도시락을 싸들고 산으로 땔감을 찾으러 갔다.꼭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기자들에 의해서 '사단장 이하 장교들이 군용트럭을 이용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먹는다'로 왜 곡되는 바람에 상부에서 나온 감찰반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물 을 먹여서 납품한 소를 적발하여 업자를 혼내주었더니 이들이 상부에 투서를 하여 또 조사반이 내려왔다.
채명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오는 조사에 진절머리가 나면서 '4·19로 얻은 자유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하는 회의가 생겼다고 한다. 이런 채명신은 박정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육본의 장경순준 장, 청주37사단장 김진위 준장과 함께 자주 만나 울분을 터뜨 리기도 했다.
'이거 무슨 조치가 있어야지 이러다간 빨갱이한테 먹히는게 아닌가 몰라.'.
이런 걱정을 함께 나누던 박정희 소장은 1961년 새해에들어 서면서는 대구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직접 5사단을 찾아오곤 했 다. 사단 비행장에서 만나 잠시 잡담을 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대로 앉아서 빨갱이들한테 당할 수는 없소. 그렇잖소, 채 장군.'.
어느 새 두 사람의 대화중에는 '쿠데타'란 말이 섞이기 시 작했다. 채명신 준장은 그러나 기름을 넣기 위해서 잠시 기착 한 박정희가 순수한 우국충정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채명신은 박 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비행장에 나가니 황 량한 활주로로 해서 더욱 춥게 느껴졌다. 박정희가 탄 L-19 경 비행기가 착륙선회를 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박정희를 비행장 에 있는 비행대장실로 안내했다. 박정희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이젠 방법이 없습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북괴에 먹히고 맙 니다. 일단 우리 군부가 주동이 돼 하루빨리 개혁의 길로 나가 야 합니다. 벌써 8기생들중엔 많은 움직임이 있소. 청년장교들 은 거사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하는데 채 장군 생각은 어떻 소.' '안됩니다. 쿠데타를 논의하는 건 해방 이후 처음일 겁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한국군이 미군 지휘하에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자칫 했다간 미군과 충돌할 우려도 있습니다. 차라 리 미국도 장면 정권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 리는 게 어떻습니까.'.
'역시 장군이라 신중하오. 젊은 장교들이야 혈기만 왕성해 가지고….' '다음 달부터는 우리 사회가 또 시끄러워질 겁니다. 4·19 발발 1주년에 즈음해선 과격한 데모가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조건이 성숙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겠군. 시기는 차후에 의논하도록 합시다.'.
박정희의 포섭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시간을 두고 자주 만나 잡담을 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시국관을 확인한 다음 결정적인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