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 유치계획
박정희 혁명계획의 핵심은 1961년 4월 19일 혁명1주년 기념일에 대 규모 시위가 발생할 것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수도권의 부대들이 폭동진압에 동원되면 이미 포섭한 장교들에 의해서 이 부대가 쿠데타 군으로 돌변,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전제가 되는 것은 4월 19일에 과격한 학생시위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 모의 세력은 학생들을 포섭하여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른바 '데모 유치공작'을 꾸민다.
이 공작 이야기는 일종의 공간사인 '한국군사혁명사'(1963년 8월 한 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발간·위원장 장경순소장)엔 빠져 있다. 이혁 명사의 원본이 된 비공개 '혁명실기'엔 적혀 있고 이낙선의 '혁명 참 여자증언록'엔 자세히 그 경과가 실려 있다.
혁명사가 발행될 때는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대결한 제5대 대통령 선거투표일을 앞두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학생들을 선동 했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혁명실기'는 '데모 유치공작'이 김종필 중령과 박종규소령에 의해 서 주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 소령 은 미국 보병학교에서 유격특수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김종필은 평소자신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박종규에게 특명을 내렸다. 3월 초순 박종규는 우선 서울대, 고려대, 건국대 학생들을 포섭하여 의식화하는 일에착수했다.
영어를 꽤 잘하는 박종규는 알고 지내는 터키계 미국여 성 사이데양의 신당동 집을 의식화 토론장소로 빌렸다. 첫 회합은 3월 7일 저녁 8시에 있었다고 '혁명실기'는 적고 있다. 참석한 학생들은 '건국대 정치과 조병규, 이두현, 고려대 정외과 김수길 등 학생회 간 부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토론에서 4·19의거 학생들의 열망을 배신한 장면 정부를뒤엎어야 한다는 과격한 토로를 했다. 박종규는 이 들의 토론상황을 미리 장치한 녹음기로 담았다.
박 소령은 이틀 뒤엔 10여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다시 불러모아 의 식화 토론을 가졌다. 박종규로부터 학생들의 동태를 전해들은 김종필 은 행동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박 소령은 학생회 간부 5명을 뽑아 각자 10명씩의 학생들을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박종규는 이들을 일종 의 특공대로 만들어 비밀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런 공작과 포섭엔 자금이 필요했다. '혁명실기'는 '당시 비용은 김종필 중령이 김용태· 공화당원내총무 역임)의 협조를 얻어 부담했는데 3백만 환이 소요됐다. 김중령도 전역하며 받은퇴직금 1백만 환을 다 쓰고도 모자라 부인의 곗돈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이데모 때 뿌릴 전단 2만 장을 인쇄했다'고 기록했다. 전단의 서두는 이러했다.
<학생이여 궐기하자! 4·19의 피가 헛되었다.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피를 흘렸던가!>.
박종규는 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 기자를 사칭했다. 친구가 경영하는 대륙통신사에 가서 '이번에 군에서 제대를 했는데 내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 려고하는데 기자증을 하나 만들어주게'라고 부탁하였다. '사진기자 박 종규'는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만났다.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은 혁명주체들은 이즈음 조직확대와 점검을 서두르고 있었다. 3월 15일 김종필, 오치성, 유승원, 이석제, 옥창호, 길재호, 김형욱, 신윤창, 박종규는 명동신도호텔 2층 객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몇 가지사항에 합의했다.
<1군사령부내의 공작은 조창대 중령에게 일임하고 수시로 감독한다. 해, 공군, 해병대 등 타군 및 2군과의 연락은 사장(박정희)과 김종필 에게 맡긴다. 공수단은 오치성과 김형욱이 책임진다. 33사단은 작전참 모 오학진 중령을 포섭하여 책임을 맡긴다. 박종규 소령은 사장의 신 변경호에 책임을 진다.> 다음날 김동환, 김형욱 중령이 대구로 내려가 박정희로부터 새로운 지침을 받고 올라왔다. 3월 22일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장면 정권과 보수층을 크게 자극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혁신계 가 주동한 악법반대궐기대회가 폭력화된 것이다.
4·19 이후 표면으로 나온혁신계 속에는 좌익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2월 13일에 조용 수를 사장으로 하여 창간된민족일보는 장면 내각 비판을 극렬하게 전 개했다. 당시 장면 정부는 좌익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해서 보안법과 반공법을 강화한 '반공임시특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놓고 있 었다. 혁신계와 민족일보는 이 법이 통과되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 게 된다고 판단, 공세를 강화했다. 3월 22일 오후2시 서울시청 앞 광 장에는 약1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들은 '밥 달라고우는 백성, 악법 으로 살릴소냐'라고 외치면서 연좌농성을 벌인 뒤 장면 총리의 사저가 있는 명륜동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혜화동에서 경찰은 약 30발의 최 루탄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중앙청 문을 부수고 일부는 택시를 잡아타고 난동을 부렸다. 이 시위 에 맞서 우익단체에선 '반공법 지지' 시위를 벌였다. 마치 광복 뒤의 좌우익 대결을 연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 다음날 김종필과 오치성은 서울근교에 주둔하는 33사단 작전참모이자 육사동기인 오학진 중령을 서울소공동 화식집 '남강'으로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시국에 관련한 이야기를 유도했다.
'민주당 정부는 반공에선 자유당보다 더 무능하다. 이대로 가다가 는 공산당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들의 수중에 들어갈 판이다.'.
'조국을 구출하는 일은 우리 장교들이 궐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육군장성들 가운데서 가장 신망이 높고 양심적인 사람을 꼽아보라.'.
'박정희 장군, 한신 장군….' '우리 하고 생각이 같다. 우리가 바로 그 박 장군과 손잡고 일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포섭된 오학진 중령은 33사단 병력을 혁명 에 동원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졸업을 앞둔 육사17기 생 도들 가운데서도 쿠데타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이 사실을 탐 지한 한 장교가 주동생도를 찾아가서 '야, 좀 기다려. 우리가 다 준비 하고 있어'하고 말렸다.
정부가 무능하고 만만하게 보이니까 생도들까지 정권탈취를 꿈꿀 정도였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