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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근대화
 국가 근대화
 
 1961년4월7일 저녁, 서울 명동 양명빌딩 4층 강상욱중령 집으로 수 십명의 장교들이 모여 들었다. 4월19일을 거사날로 내정했던 박정희 소 장은 포섭한 주체세력 전체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많은 영관 장교들은 이날 비로소 박정희 소장과 처음 만났다. 비공개 자료 '5·16혁명실기' 는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박정희 소장, 김재춘대령(6관구 사령부), 이병엽대령(33사단), 오 치성대령(육본), 유승원대령(육본), 박치옥대령(공수단), 문재준대령(6 군단 포병단), 김제민중령(공수단), 김종필예비역 중령, 김형욱중령(육 본),옥창호중령(육본), 길재호중령(육본), 이석제중령(육본), 김동환중 령(육본), 신윤창중령(6군단 포병단), 정문순중령(육군대학), 조창대중 령(1군 사령부), 김용건중령(육본), 박원빈중령(6관구 사령부), 강상욱 중령(육본), 이백일중령(30사단), 오학진중령(33사단), 박순권중령(육 본), 최홍순중령(육본), 정치갑중령(육본), 홍종철대령(6군단), 이지찬 중령(육본), 이낙선소령(육본), 차지철대위(공수단).>.
 
 5·16거사가 성공한 이후 이들 29명 가운데선 한 사람의 대통령,세 사람의 중앙정보부장, 두 명의 대통령 경호실장, 일곱 명의 장관과 국 회의원이 배출된다.
 
 이날 회의에서는 4월19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것 외에 몇 가지 중요 한 방침을 확정했다. 혁명지휘부의 구성을 작전반, 행정반으로 나누고 작전책임자는 박원빈, 행정책임자는 이석제 중령으로 삼았다. 박정희 소장의 명을 받들어 행정반과 연락할 담당자는 오치성 대령, 작전연락 은 강상욱 중령, 이들 두 반을 통합하여 조정하는 임무는 김종필 중령 에게 주어졌다. 1군 사령부의 조직은 조창대 중령에게 맡기기로 했다. 조직이 확대되어 보안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으므로 앞으로의 회합은 반중심의 소규모로 하기로 했다.
 
 이틀 뒤 명동 신도호텔에선 작전반 회 의가 열렸다. 연락장교 강상욱은 박정희의 지시를 전달했다. 중앙청,반 도호텔(총리실), 방송국, 송신소, 육본 등 주요시설의 점거계획을 만들 고,공수단 병력으로써 총리와 장관 등 정부요인들의 체포계획을 세우라 는 지시였다. 아울러 가두방송과 전단공중살포 계획도 지시했다.
 
 행정반은 그 동안 이석제 중령이 중심이 되어 계속해왔던 혁명정부 의 권력구조 및 정책안의 작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국민, 학생, 재향 군인,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작성에 골몰했다. '전국학생에 게 고함'이란 제목의 글은 거사의 명분을 '배신당한 4·19혁명 정신을 되살리는 것'에 두었다.
 
 <(전략) 군은 이 모든 망국멸민의 화근을 과감히 발본하여 정치를 혁신하고 국가경제의 안정, 국민도의의 앙양, 반공자주통일을 성취해서 국운의 신장을 기함과 아울러 세계자주열방과 더불어 공존공영, 세계평 화에 공헌함이 시대적인 요청이며 국가민족의 지상명령임을 신념하고 궐기행동한 것이다. (후략)> 행정반장 이석제 중령은 한때 고시공부를 한적이 있어 그 법률지식을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는 도서관 을 누비고 신문을 참고하며 명치유신 등 외국의 혁명사례들을 연구했다.
 
 4월초 그는 서울대학교로 한태연교수를 찾아갔다. 고시 공부를 할때 한 교수의 저서를 달달 외우다시피했던 이석제 중령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 기를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떠보려고 했다. 한 교수는 우리 사회에 무엇 인가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군인들이 집권할 가 능성을 아주 낮게 보고 있었다. 그때 장면 총리가 여러 차례 쿠데타 계 획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고도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중의 하 나로 민간 정치인들의 머리 속에는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란 개념 이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조개국 이후 정치를 독점해온 문민 정치인들의 입장에선 군인에 의한 정변은 외국에서나 있 을 수 있는 일이었다. 12세기의 고려 무신란이란 단 한번의 군사정변밖 에 갖지 못한 우리나라의 생리에 비추어 군인이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 바깥에 존재했다.
 
 이석제가 혁명 이후의 국가구조와 정책을 그리는 데는 박정희와 김 종필로부터의 지침과 제안이 뼈대가 되었다. 이석제는 일찌감치 부국강 병과 반공을 국정목표의 제1의로 삼았다. 이중령을 비롯한 주체세력의 태반이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한 장교들이었으므로 노골화된 좌익활동에 대한 반응은 유달리 예민했다. 이석제가 계획서를 만들고 있을 무렵에 김포해병여단 소속 장교 두 사람이 한낮의 종로 뒷골목에서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해병여단에선 트럭 두 대에 군인들을 태우고 달려와 종로 일대를 포위하곤 깡패들을 잡아내 개패듯이 두들겼다. 경찰력이 약화되니까 곳곳에서 군인들과 깡패들이 격돌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이석제는 '깡패소탕'을 혁명후 사업리스트 에 올렸다. 혁명후의 국정방향수립에 참여한 박정희, 김종필, 이석제 세 사람은 일본의 자주적인 근대화 혁명인 명치유신에 대한 이해가 깊 었다.
 
 자연히 '국가근대화'란 말이 혁명이념으로 등장했다. 당시 제3세계 에서 유행하던 군사쿠데타의 대부분은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반면, 박정희는 근대화, 즉 경제발전을 핵심목표로 하는 혁명을 추진한 점에서 특이하다. 박정희는 1951년 6·25동란중에 이미 '공산화를 막기 위해선 빈곤퇴치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5·16혁명의 특이점은 민간 정치인이나 관료출신도 아닌 군인이 경제개발을 혁명의 중점목표로 설 정한점이다. 박정희는 정치적 문제의 근본이 경제라는 점을 이해한 사 람이었다. 그가 한때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가 배우고 나온 점이 하나 있다면 '경제라는 하부구조가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는 시각이었을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경제기획원, 그리고 중앙정보부 설치는 김종필 의 발상이었다. 정보장교출신인 김종필은 미군으로부터 미CIA에 대한 강의를 여러번 들었다. 그는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 조정하여 국가적 차원의 정보판단을 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CIA와 같은 중앙정보부의 설 치를 생각했다고 한다.
 
 '아울러 혁명을 뒷받침할 무서운 기관으로서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혁명이 끝나고 민간정부가 세워질 때는 수사권을 분리시켜 FBI와 같은 기구를 만들고 국가안전에 관한 수사를 전담시킬 생각이었 습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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