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계획서를 장도영에게 건넸는가
1961년 봄 강원도 화천북방 사창리에 있던 15사단장 유양수(주월 대사 및 동자부장관 역임) 소장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 다. 사단작전지역내 산기슭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헌병부장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다.
'민주당 정권과 결탁한 업자가 도청으로부터 벌목 허가를 받아 숯을 굽고 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유 소장은 '세상에, 작전지역 안에서 무슨 짓이냐' 고 호통을 치고는 업자들을 쫓아내버렸다. 부대 매점의 납품가격을 조사해 보았더니 시중의 시세보다 비쌌다. 불쌍한 군인들을 상대로 이런 폭리를 취하는 납품업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양조장 업자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다.
유양수 소장은 납품가격을 내리지 않으려면 철수하 라고했다. 민주당 의원이 말을 듣지 않자 납품을 금지시켰다. 주한미국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3년간 근무하고 돌아와서 사단장이 되었던 유양수 소장은 군내에선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도 민주화가 몰고 온 자유라는 것이 '부패의 자유'이자 '자유의 부패'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정치적이지 않은 일선 사단장들 조 차도 사석에서 모이면 '이런 정권을 뒤엎어야 해'라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4월 중순 유양수 소장은 장도영 참모총장에 의하여 육본작전참모부 차장 및 전쟁계획통제관으로 발탁되어 서울로 갔다. 당 시 미8군은 우리 육군에 대해서 '전쟁계획(War Plan)'을 만들도록 강력 하게 요구하여 유 소장이 그 책임자로 뽑힌 것이다. 그는 육군회관 앞 마당에서 천막을 쳐놓고 작업을 하던 중 5·16을 맞아 다른 일을 맡게 된다.
당시 육본의 부관감은 유양수와 동기(육사특7기)인 방희 장군이었다. 부관감은 영관급까지의 육군인사를 관장하는 요직이었다. 방희장군은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일 때 생도로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에 대 한 강렬한 기억을 한 토막 갖고 있었다.
1949년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육본 정보국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 하고 있을 때였다. 방희 대위는 동기 김홍식과 함께 수표동의 방 두 개 짜리 요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방에선 박정희가 만군시절친구 인 이주일, 윤태일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방희 쪽으로 옮겨 합석 했다.
한참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순찰중이던 용산 헌병대장(소령)이 들어왔 다. 헌병대장은 박정희와는 평소 무슨 유감이 있었던지 기분 나쁜 이야 기만 털어놓았다. 묵묵부답하던 박정희는 꿀이 담긴 접시를 말없이 손 으로 받쳐들더니 헌병 대장의 얼굴을 향해서 던졌다.
헌병대장의 얼굴에선 꿀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접시는 산산조각이 났 다. 낭패를 당한 헌병소령은 권총을 뽑아 장전했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박정희를 향해 조준했다. 박정희는 태연자약에 묵묵부답 그 대로였다. 방희 대위가 상을 넘어 가서 권총을 빼앗고 운전병을 불러 헌병대장을 태워 보냈다. 그래도 박정희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방희 장군은 최근 '노병의 추억'(육사7기특별동기생회)이란 책에서 이 렇게썼다.
<만약 그때 그 헌병소령이 취중에 방아쇠를 당겼더라면 역사는 달라 졌을 것이다. 궁정동에서의 최후 때도 같은 광경이 재연되었을 것이라 고 확신하기에 무엇인지 운명적인 종생의 길이 아닌가 느끼게 된다.>.
박정희 장군에 대한 이런 체험을 가진 방희 장군은 사회가 혼란해지 자 그가 생각났다. 방희는 박정희를 단독으로 찾아가서 '혁명의 불가피 함'을 역설했다. 이때도 박정희는 묵묵부답이었다. 5·16새벽에 육본으 로 달려간 방희는 용변을 보고 나오던 박정희 소장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헤어졌다고 한다. 박정희는 좀처럼 속을 드 러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상대를 긴장시키고 상대를 자신의 자장안 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박정희가 거사일로 정한 4월19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박정희의 증언 을 듣는다.
<4월10일경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는 상당히 계획이 진전된 때인데 우리가 논의하여 기록해 놓은 혁명위원회의 구성, 정부기구의 개편, 임 시헌법 등을 녹취 기재한 서류를 장도영 장군에게 보이며 4·19가 무사 히 넘어가겠느냐, 무슨 일이 있지 않겠느냐 등의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서류를 장장군에게 교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장 장군이 군사혁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알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상의 진술은 5·16 거사 뒤에 장도영과 그 측근들이 반혁명재판을 받고 있을 때 박정희가 증인자격으로 한 내용이다. '신동아' 1984년8월 호에 실린 장도영의 회고는 다르다.
<4·19혁명 1주년을 4, 5일 앞둔 일요일 아침 내가 총장 공관에서 정 장으로 단장하고 육군본부 교회에 나가려고 현관에 나서자 박정희 장군 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2군 상황과 4·19혁명 1주년 기념일에 대비할 계획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렸습니다.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 보다시피 지금 예배당으로 가는데 시간이 다 됐다'고 하였더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속히 간 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하므로 할 수 없이 현관에서 다시 응접실로 들어와 둘이 마주 앉았다. 당시 육군은 이미 3월에 서울지구 주둔 부대와 일선 제5사단의 출동을 포함한 폭동진압과 질서유지를 위한 '비둘기 작전계획'의 지휘부 연습을 끝내고 이번에 무슨 시위난동이 있어서 계 엄이 선포되면 계엄업무를 한번 본격적으로 철저히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박정희는 4·19에는 무엇이꼭 일어날 것이라면서 '지금 군 사령관(최경록 2군 사령관은 도미 시찰여행중)도 부재중이고 해서 제가 대략 계엄시행계획을 작성하여 놓았습니다'하며 접은 원고지 몇 장을 내놓았다. 나는 '잘 했소'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 읽어보지요'하고 표 지에 '서울지구계엄실시 계획안'이라고 쓰여진 원고를 옆에 서 있는 부 관에게 주며 '저 책상에 갖다 두라'고 하고 일어나서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책상에 있는 그 계획서를 잠깐 들여다보니 계엄이 선포되 면 그 해당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며, 전국 또는 서울지역의 계엄일 경우에는 현행 헌법에 의해서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 며 계엄업무를 육군의 일상업무와 분리하기 위해서 별도로 계엄사령부 를 설치하고 별개의 참모진으로 그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 등이 포 함되어 있었다. 부대배치 약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아무 특이한 것도 없었고 또 그 내용이 이미 비둘기 작전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어서 박장군 자신이 제6관구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해야 할 따름이라고 생 각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