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자금
박정희로부터 '혁명자금 5백만환만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에게서 얻 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황용주 주필이 김사장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쿠데타가 발생했다. 김지태가 그런 부탁을 전달받았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는 알 수 없다. 김지태 사장은 5·16 직후 밀수 혐의로 구속되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운영권을 빼앗긴다. 협조해주지 않은 데 대한 혁명주체들의 보복이란 주장이 있다. 협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는 김지태측으로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혁명모의 자금을 마련하러 다닌 것은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민간 인으로 참여한 김용태(공화당 원내총무 역임)였다. 김종필이 혁명 성공 후에 실토한 거사자금 총액은 9백85만환. 박정희가 네 차례에 걸쳐 총 40만환을 냈다. 김종필이 제대비 90만환을, 이주일 2군 참모장이 50만 환, 유원식 대령이 10만환, 길재호 중령이 40만환, 길중령의 친구인 고 진영 예비역 중령이 구멍가게를 판 돈 45만환, 김용태가 1백50만환, 실 업가 남상옥이 5백50만환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만8천 환,금 한 돈쭝이 8천원이었다.
거사자금9백85만환은 요즘 가치로는 1억 원 남짓하다. 그런 거사자금으로 나라를 얻었으니 가장 효과적인 투자 였던 셈이다. 박정희의 지도력과 민심과 군심의 뒷받침 때문에 돈으로 누구를 매수할 필요가 없어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는것이다.
민간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자금을 댄 사람은 중견 실업인 남상옥· 타워 호텔 소유자)이었다. 그는 4·19 후에 유원식 대령을 통해서 박정 희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박정희가 구상하는 혁명에 대해서 조언을 할 정도로 서로 믿는 사이로 발전했다. 1961년 3월28일 김종필이 박정희의 사신을 갖고 삼화빌딩 309호실로 남상옥을 찾아왔다. 남씨는 편지를 펼쳐 읽어보았다.
<국내정국은 일익복잡과 다난을 조성하고 있고 사회풍조는 혼란과 허탈일로를 줄달음하고 있을 뿐 조국과 민족의 전도에 암담한 우수가 뇌리를 거래할 뿐입니다. 연이나 상제께서 헐벗고 가난한 이 나라 이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는 한 또한 우리들 자신이 자립갱생하겠다는 개척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한 낙심과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이며 이런 시기일수록 대의를 위하여 대용을 분발해야 할 시기라고 확 신하는 바입니다.
금일 이 서신을 지참하는 김종필 군은 제와 모든 것 을 상의할 수 있는 지기지우이며 또한 제의 질서(조카사위)입니다.목하 제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위하여 김군편에 자금을 좀 보내주시기 바 랍니다. 정장지단하와 이만하고 배미지기로 미루고 더욱 보중하시고 건 투하시기 기망하오며 각필하나이다. 박정희 배상>.
이날 남상옥은 1백20만환을 건네주었다. 4월4일엔 박정희가 직접 남상옥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남씨는 또 백만환을 주었다. 그 뒤 두 차 례 김종필에게 백만환씩 주었다. 5월13일 박정희는 남상옥을 집으로 불러 '5월16일에 결행하기로 했으니 마지막으로 부탁한다'고 했다. 그날 은 토요일이라 갑자기 돈을 구할 수 없었던 남상옥은 일단 사무실로 돌 아가서 4백만환을 구해서 김종필 편으로 보냈다. 남씨는 월요일인 5월 15일에 다시 백만환을 보냈다. 5월14일 혁명주체들의 마지막 작전회의 때 김종필이 '식구들에게 양식이라도 사줍시다'라면서 돌린 돈은 남상 옥이낸 것이었다(이상의 액수는 '5·16혁명실기'에 기록된 것인데 김종필이 기억한 액수와 다소 차이가 있다).
돈을 만드는 재주가 없었던 박정희는 대구에서 김덕승이란 민간인 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1961년 3월, 박정희는 그에게 2백만환만 구 해달라고 했다. 김덕승이 며칠 뛰어보다가 구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이 번엔 다시 3백만환을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5월1일 김덕승은 다시 빈손으로 박정희를 찾아가서 자신의 무능을 호소했다. 박정희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는 '여보 김형, 무슨 수를 써서라도 5백만환만 마련해주시 오'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김덕승은 서울에서 한양산업주식회사란 건설업을 경영하는 오인환 사장이 떠올랐다. 박정희의 양해를 얻어 '군 불하물자가 있으니 급히 내려오라'는 요지의 전보를 쳤다. 김덕승은 대구로 내려온 오인환을 박 정희에게 인사시켜준 뒤 '혁명자금을 보태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 다.이 말에 겁을 집어먹은 오사장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아는 국회의 원을 찾아가서 쿠데타 음모를 제보하고 장면 총리한테까지 이 정보가 들어간다.
5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준비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4월말, 4·19 학생데모 유치공작을 맡았다가 실패한 박종규 소령은 그 일의 뒤 치다꺼리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4월24일 포섭했던 한 대학생이 박종규 를 찾아왔다.
'경찰이 우리가 시위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탐지하고는 쫓고 있 습니다. 어디 좀 숨겨주십시오.'.
박종규는 2만환을 건네주고는 보냈다. 이때 이낙선 소령이 오더니 '김종필 선배가 좀 보자고 한다'고 했다. 따라 간 곳은 명동 사보이 호 텔의 객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신경질을 냈다.
'아직도 학생들과 손을 끊지 않았나?' '간부급과는 계속 접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만났어?' '한 30분 전에 만났습니다.'.
김종필은 동화통신에 난 기사를 보여주었다.
'모 예비역 육군중령이 조종하는 정부 요인 암살단 간부학생 한 명이 치안국에 체포되었다'는 기사였다. 김종필과 박종규는 자신들이 포섭했던 학생 중 한 사람이 경찰에 붙들려 진술한 것이라고 지레 짐 작했다. 박소령은 다섯 명의 간부급 대학생들을 불러모았다. '경찰에 붙들려 갈 때는 각자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배후 조종자라고 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며칠 뒤 동화통신에 보도된 기사의 주인공은 과대망 상증환자로 밝혀졌다.
4월26일, 김종필은 박종규 소령을 대구로 보내 반도호텔내 장면 총리사무실의 정찰에 필요한 자금을 구해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 박소 령은 박정희 소장의 관사를 찾아갔다.
'반도 호텔에 사무실을 하나 내 놓고 장면 총리를 감시하려고 합 니다. 아무래도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덕승이한테 부탁을 해놓았는데 오늘 오후에 오더니 어렵겠다고 하더군.'.
마침 그때 영천에 있는 육군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이 박 장군을 찾아왔다. 박정희는 한 준장에게서 3만환을 빌려 차비에나 보태쓰라면서 박 소령에게 주었다. 박종규는 그날 밤을 박정희의 관사에서 보내고 다음날 빈 손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