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의 불만
육본 교육처장 장경순(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은 5월15일 오후 박 정희로부터 '내일 거사야'란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장경순은 '그럼 저는 뭘해야 하지요'라고 물었다.
'장 장군은 장도영 총장과는 대학동창이잖아. 그러니 혁명을 이끌 어달라고 설득해주어야겠어. 또 하나 박치옥 공수단장도 동참하기로 했는데 공수단의 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져주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더 데리고 와도 좋습니까.'.
'알아서 하시오.'.
장경순은 아끼는 부하 권천식 소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경순은 일단 집에 들렀다가 '야간 비상훈련에 참가하러 간다'고 아내에게 말 한 뒤밤늦게 친구인 한웅진 준장이 기다리고 있는 화신 옆 미화호텔로 향했다.
혁명전야의 밤이 깊어가고 있던 이 순간 군부 쿠데타의 성패에 결 정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 청와대에서 장면 총리에 대한 불만을 가득 품은채 살고 있었다. 실권이 약한 제2공화국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출 신 윤보선이었다. 신파 출신인 장면 총리와는 원래 친밀하지도 않았지 만 이즈음은 결코 한때의 정치적 동지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관 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윤보선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서 윤보선은 '장면 총리 의 배신'이란 표현을 써가면서 그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윤보선이 나라가 총체적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1961년 3월22 일, 혁신계가 주동한 야간 횃불 시위였다. 이날 밤 윤보선은 서민으로 변장하여 지프를 타고 시위대를 뒤따라가면서 그들이 외치는 섬찝한 구호를 듣고는 '색채가 수상하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윤보선은 청와대로 돌아와서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 장시간 대책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가없었다.
그때 장면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제정하여 과격한 시 위를 다스리려고 했다. 민주당 구파가 분당하여 만든 야당인 신민당도 내심으론 이 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리당략적 이해관계로 반대하여 정부는 이 법의 통과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즈음 민심을 파 악하기 위해서 부산에 다녀온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와서 위기감을 전달했다.
'지금은 여고 야고 가릴 때가 아닙니다. 여야의 지도층이 한데 모 여서 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급히 불러서 회의를 갖도록 합시다.' 이날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소집한 원로 모임엔 장면총리, 곽상훈,참의원 의장 백낙준, 신민당 대표 김도연, 간사장 유진산, 국방장관 현석호, 그리고 양일동 조한백 의원이었다. 곽상훈 이 부산에서 느낀 민심을 설명했다.
'서울에 있으면 언론이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 기 쉬운데 이번에 부산에 가 보니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상상보 다 격심했소.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윤보선은 장면을 압박하는 발언을 했다.
'중대한 사태를 수습할 소신과 방안이 없다면 거국내각이라도 만 들어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하지 않겠소?'.
장면 총리는 '좀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 으나 거국내각 이야기가 계속 제기되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윤보 선 회고록).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 있겠소?'.
이 말에 윤보선은 발끈하여 이렇게 쏘아붙였다.
'장 총리가 지금까지의 국내 실정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이날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으나 윤보선은 피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에게 는 '이날 회동에선 신생활 운동에 대해서 논의했다'고 발표하기로 약 속했다. 그러나 다음날 여당에선 윤보선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대 통령이 신민당 편을 들어 장면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그 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성명이 나왔다. 윤보선은 이 사건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의 정치적 결별'이었다고 썼다. 5월16일 아침 군사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하게 되는 윤보선 대통령의 동기 가운데는 장면 총리에 대한 불신도 끼여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 모의에 참가했으나 돌출적인 행동 때문에 마지막엔 소외되었던 유원식 대령은 임시정부 요인 유림의 아들이었 다. 그는 윤보선의 친구인 심명구를 통해서 윤 대통령과 접촉하려고 했다.1961년 봄 심명구는 윤 대통령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군 일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책동하는 모양인데 들어본 일이 있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나잇살이나 든 사람이 왜 그런 허무맹랑 한 말을 하는가.'.
'지난 정초에 하례객으로 청와대를 다녀간 육군 대령이 그 거사를 모의하는 군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대통령을 다시 한번 만나 보고싶어 한다던데.' '자네 무슨 그런 부질 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나. 큰 망신당하기 전에 입을 다물게.'.
그런 핀잔을 듣고도 심명구는 '그 육군 대령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고 대통령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더란 것이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면 어찌 내가 여기에 앉아서 만나야 되겠는가? 그런 소리 하려면 여기 오 지도 말게나.'.
윤보선 대통령은 여러 경로로 군부 쿠데타설에 접하고 있었으나 실권이 없는 그로서는 할 일이 없었다. 한번은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장 총리나 국방장관도 다 알고 있는 일인데 대수롭지 않은 역정 보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