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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과 6관구 사령부
 1군과 6관구 사령부
 
 쿠데타군의 지휘소가 될 영등포 6관구 사령부에는 김재춘 참모장과 박원빈 작전참모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김재춘 대령은 먼저 황산웅 수송관을 불러 이틀 전에 지시한 사항을 확인했다. 스리쿼터에 기름을 가득 넣어두도록 지시했던 것인데 그 사이 누가 기름을 빼내 팔아 먹었을지도 모르고 타이어가 터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명주체로 포섭된 황 대위는 20대의 트럭을 2개 중대로 편성하여 10대를 공수단으로 보내고 나머지 10대는 비상대기시켜 두라는 지시를 받아두고 있었다. 김재춘은 본부사령 계충의 소령을 불렀다. 그도 포섭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혁명대열에 참여할 장교들이 오는데 대부분이 무장하 지 않은 상태일거야. 그러니 우리 본부에 있는 총과 실탄을 준비해두게.'.
 
 김재춘은 한달 전부터 이미 위병교육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붙여 1 개 소대 병력을 본부사령 지휘하에 두도록 했었다. 이날 다시 제10경비 중대에서 1개 소대를 뽑아 본부사령 아래로 배속시켰다. 본부 무기고엔 45구경 권총을 포함, 15발들이 탄창을 끼워 단발 사격을 하는 카빈M1과 30발들이 탄창을 꽂아 자동연발사격이 가능한 M2가 2백여 정이 있었다. 계충의 소령은 이들 소총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15일 밤의 주번사령은 비상출동 명령을 내리는 데 관계하고 본부의 병력을 지휘하는 등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되어 있었다. 박원빈 중령은 자신이 이날 주번사령 이라고 착각하여 박정희에게 이날을 거사일로 하자고 건의했었다. 나중 에 알아보니 이날 주번사령은 공병참모 하 중령이었다. 그는 육사8기로 박원빈과는 동기였지만 포섭되어 있지 않았다. 김재춘 참모장과 의논하 였더니 능수능란한 참모장이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김재춘은 2 군 사령부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에게 전화했다. 박 대령은 육사5기로서 동기 사이일 뿐 아니라 혁명군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박기석에게 부탁 하여 하 중령을 대구로 불러내릴 구실을 만들었다. 김재춘은 대구로 출장을 보낸 주번사령 대리로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부관참모 이경 화 중령을 근무하게 하였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또 한 사람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이었다. 1940년 박정희와 함께 신경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들어간 이래의 친구 사이였다. 그의 휘하엔 5개 군단 20개 사단이 있었다. 적어도 수치상으론 이한림이 반대하면 어떤 쿠데타도 성공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군 정보기관이 활동하 고 있으므로 적절히 대처할 것'으로 믿고는 적극적인 음모 분쇄에 나서 지 않고 있었다. 장도영, 이한림, 그리고 많은 장성들이 박정희의 쿠데 타 모의를 알고도 이를 장면 총리에게 보고하여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장면 정부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의 결 여를 보여준다.
 
 많은 장교들은 장면 정부가 민주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 인지지를 바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의 3대 내용물인 자유, 복지, 안보 가운데 3분의 2(복지와 안보)가 결격인 장면 정부는 이들에게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이름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무능과 부 패는 장면 정부에 대한 민심과 군심의 이반을 불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한림은 친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내가 야전군을 믿는 것처럼 서 울도 그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과 기능이 있으므로 잘 될 것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회고록 '세기의 격랑').
 
 5월15일, 이한림 중장은 그동안 야전군에 대한 업무파악을 위해서 미루어 두었던 1군 창설 기념식 행사를 원주의 사령부 연병장에서 성대 히 거행했다. 야전군 산하 전중대의 대표들이 수천 기의 중대기를 들고 참석하게 한 기념식은 장관이었다. 이 행사를 참관한 5명의 군단장, 20 명의 사단장 가운데 내일 새벽에 거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5군단장 박임항, 5사단장 채명신, 12사단장 박춘식.
 
 박임항은 만주군관학교 1기출신으로서 박정희와 이한림보다는 한 기 선배였다. 채명신, 박춘식은 육사5기 출신으로서 박정희를 참모장으로 모시고 참모로 근무하면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한림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20개 사단이 박정희의 음모를 저지 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으나 음모의 긴 손은 바로 그의 발밑까지 와 서 굴을 파고 있었다. 15일 오전 박정희의 밀사 이낙선 소령이 친서를 품고 1군 사령부 작전처 조창대 중령을 찾아왔다. 조 중령은 1군내 혁 명조직의 중심이었다. 이낙선이 전달한 친서는 박임항, 채명신 장군 앞 으로 된 것인데 저녁식사 후 전달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조창대 앞으로 된 친서와 이낙선을 통해서 구두로 전달한 메시지에서 박정희는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거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박임항 중장을 통해서 이한림을 설득해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또 육사8기 중령들이 접촉 하지 않고 있던 포병참모 정봉욱 대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 을 전달했다. 정봉욱은 6·25 때 낙동강 전선에까지 내려왔던 인민군 포병장교(당시 중좌)였다. 국군에 투항해온 그는 박정희가 사단 포병단 장일 때 부하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창대는 쿠데타 지도자의 친서를 받은 직후 이종근, 심이섭, 박용기 중령에게만 내용을 알려주고 다른 장교들에겐 '오늘밤 9시 작업복 차림으로 박용기 집으로 모여라'고 통 보했다.
 
 조창대는 창설기념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던 축구 경기장으로 가서 박임항, 채명신 장군을 만났다. '오늘 오후 6시에 여관으로 찾아뵙겠다' 고했다.
 
 조창대는 저녁에 두 장군을 찾아가 박정희의 친서를 건넸다. '이한림 사령관을 설득하여 혁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친서의 요지였다.
 
 조창대는 밤 9시 박용기 중령의 집으로 향했다. 조창대, 이종 근,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 중령이 모였다. 안찬희 중 령은 이한림 사령관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조창대는 박정희의 친서를 낭독한 뒤 불태웠다. 이들은 밤 11시엔 조창대 중령의 관사로 옮겨 다음날 새벽 5시 방송을 기다리기로 했다. 후방지역의 쿠데타군 장교들에겐 KBS의 아침 5시 혁명공약낭독 방송이 행동지시가 되게끔 계 획되어 있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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