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를 불태우고
장경순(국회 부의장 역임) 준장은 박정희 소장차와 자신이 탄 지프 사이에 끼여든 검은색 지프를 앞지르도록 운전사를 재촉했다. 추월당한 검은 지프는 금방 장경순의 차를 다시 앞질러 박정희 차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장경순은 문제의 지프가 군 수사기관에서 미행으로 붙인 것임을 직감했다. 박정희가 탄 차는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던 미화호텔 앞 길가에 멈추었다. 미행차는 보이지 않았다. 한웅진 준장이 호텔 객실에두고 온 권총을 가지러 간 사이 장경순은 박 정희에게 다가갔다.
'각하, 미행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지하고 갈 테니까 빨리 가 십시오.'.
한웅진은 두 자루의 소련제 권총을 들고 나왔다. 박정희는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소제로 바꾸어 찾다. 박정희가 탄 앞차가 다시 출발하여 안국동쪽으로 달리자 어느 새 미행차가 나타나 따라붙는게 아닌가. 안국동∼중앙청∼시청을 거쳐 서울역쪽으로 가느냐, 소공동 한국은행쪽으로 가느냐의 갈림에서 장경순은 미행차를 가로막고 박정희가 탄 차를 서울역쪽으로 달리게 한 뒤 한국은행쪽으로 유도하려고 소공로로 달렸다. 뒤돌아보니 미행차는 속지 않고 박정희 차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장경순이 탄 차가 다시 미행차를 추월했다. 장 경순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아무래도 처치해야겠다고 서두르는 데 미행차는 삼각지를 지나서 한강 인도교를 눈앞에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미행차에 탔던 김응서 대위는 이때 무전으로 '11시쯤 박정희 소장을 포함한 2∼3명이 신당동 자택을 출발하여 지금 삼각 지를 지나 한강 인도교를 건넜습니다'라고 506부대로 보고한 뒤 철 수한 것이다.
한강 인도교를 넘기 직전, 박정희와 동행했던 김종필이 내렸다.
김종필은 일이 잘못되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 처삼촌을 전송하는 기분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김종필은 내리면서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김종필은 뒤따라 온 자신의 지프를 타고는 안국동의 광명인쇄소로 달렸다.
장경순은 미행차를 따돌린다고 이리저리 차를 몰게 하는 바람에 한강 인도교를 넘었을 때는 박정희 차를 놓쳐버렸다. 사육신묘를 지 나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갔더니 박정희가 지프 를 세워놓고 내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뛰어오는 장경순에게 '왜 늦었소?'라고 한 마디 한 박정희는 다 시 차에 올라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이 시간 이석제(총무 처 장관,감사원장 역임) 중령은 6관구 사령부 앞에서 애타는 순간들 을 보내고 있었다. 이 중령은 집을 나올 때 45구경 권총은 허리에 차고 작은 리볼버는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불안한 만큼 권총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권총을 만지면서 하루 전날 마지막 작전 회의에서 박정희가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 것, 문제는 순리대로 풀 것, 그 리고 시민들에게는 친절할 것.'.
밤 10시, 이석제는 지프를 타고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 유승원 대 령, 이형주 중령 등과 만났다. 이석제만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행 정반장인 이석제는 자신의 지프 뒷자리에 여섯 개의 서류보따리를 두고 있었다. 집권 후에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부처별로 추진할 정 책안, 민주당의 주요 정책안, 장차 기용할 인물들의 명단과 이들에 대한 자료, 혁명 초기에 사용할 각종 전단, 방송문, 성명서, 대외메 시지, 후진국 경제자료, 입법자료, 혁명법령 따위가 들어있는 보따리 때문에 뒷자리엔 이형주만 탈 수 있었다. 차가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육본 검열단에서 왔다'고 해도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이석제는 차를 돌려 사령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세웠 다. 차에서 내린 이석제는 정문 부근에 20여 명의 장교들이 어둠 속 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박 장군 오셨나?'라고 물었다.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석제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 마지막 작전회의가 생각났다. 혁명군 출동계획을 짠 박원빈 중령을 향해서 이석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출동부대의 지휘관들에 대한 조치내용이 없습니다. 이들 지휘관들은 사전에 연금시키고 통신은 두절시켜야 합니다. 만약 반혁명 세력이 선수를 쳐서 부대를 장악하면 병력동원 에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박원빈 중령은 '뭐 그럴 것까지 있나'란 태도였고, 박정희도 침 묵을 지켜 이석제의 건의는 묵살되었다. 이석제는 속으로 '박원빈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하는 원망이 생기더라고 한다. 이석제는 이 순간정문의 병력이 쿠데타를 저지하려는 6관구 사령관측에서 배치시 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박원빈씨는 그 때 정문에 배치한 병 력은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우군이었다면서 '작전참모를 만나러 왔 다'고 했으면 통과시켜줄 것인데 이석제 중령이 '육본에서 왔다'고 하는 바람에 통과시켜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사비밀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한 이석제는 지프에 실어둔 혁명관 련 서류들이 걱정되었다. 특히 혁명이 성공할 경우 기용하려는 인사 들에 관한 서류는 엉뚱한 피해를 부를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석제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형주 중령에게 '형주야, 나를 좀 도와다오'라고 했다.
'왜 그래?' '상황이 심상찮다. 우선 인사서류를 태워야겠다. 좀 찾아줘.'.
이형주가 뒷자리에 수북이 쌓인 보따리를 풀어서 서류를 끄집어내 바깥으로 던졌다. 이석제는 이를 받아 성냥불을 그어 태우기 시작했 다. 그러는데 지프 한 대가 정문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탄 차였 다. 이석제는 서류소각을 중지하고 자신의 지프에 올라탔다. 그는 박 정희의 지프 뒤에 붙었다. 초병이 '누구야?'라고 했다. 2년 전 6관구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나야'라고 위엄있게 말했다. 초병들은 안으로 전화를 걸더니 김재춘 참모장의 명령을 받아 바리케이드를 치워주 었다. 이 순간 바깥 담벼락에 붙어서숨어 있던 장교들 수십명이 '우∼' 하고 박정희 장군 차의 뒤에 붙어 사령부 안으로 들어왔다. 장교들은 걸어서 가고 박정희, 이석제의 지프는 사령부 건물까지 굴러갔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