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
1961년 5월15일(월요일) 육영수는 신당동 집에서 중대한 일을 앞 두고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혜, 근영 두 딸을 학교로 보낸 뒤 그녀는 집일을 거들어주던 아줌마를 불렀다.
'고향에 가서 2, 3일 쉬다가 와요.' '갑자기 고향은 왜요?'.
아줌마는 육영수의 고향 근처 마을에서 온 사람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쉬어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차비를 넉넉하게 주어 보냈다. 이날 박정희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잇따랐다. 김종필, 장태화, 이낙선은 안방에서 박정희와 함 께 머리를 맞대고 종일 문건을 읽고 고치고 정서하고 있었다. 육영수 는 이들에게 커피와 과일을 대접해올리면서 틈만 나면 집안 구석구석 을 뒤져 헌 옷가지와 빨랫거리를 찾아냈다.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박정희와 결혼한 딸과 줄곧 같이 살아왔던 이경령은 딸의 거동이 수상스러워 물었다.
'이 바쁜데 무슨 빨래냐. 무슨 일이 있느냐.' '아무 염려 마셔요. 어머닌 모르셔도 괜찮으셔요.'.
밤이 되었다. 육영수는 근혜, 근영, 지만 3남매를 이경령이 데리 고 안방에서 주무시도록 했다. 육영수는 빨래를 한 가지씩 다리미로 다려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있던 방으로 건너갔다. 박정희는 장태화,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일 어나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영수는 '저 보세요'라고 불렀다. 육 영수는 남편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저 보세요' 라고 했다.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
박정희는 서슴없이 '어, 그러지'하고 아내를 따라나갔다. 박정희 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국민학교 5학년생 근혜를 굽어보고 는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영, 지만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왔다. 장태화가 '무슨 숙젭니까'하고 물었다.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
장태화는 이 순간의 육영수와 박정희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남편이 지금 나가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녀들과 자 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도록 한 육영수의 기지와 긴박한 순간에도 그런 여유를 보여준 박정희의 인간성 때문이었다. 지금 한나라당 소속인 박근혜 의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 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 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님 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님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은 박정희는 아내가 작은 가방에서 꺼내주는 권총을 찼다. 군화를 신은 채 마루의 의자에 앉았 다. 김종필 총리의 기억으로는 이때 전화가 왔다고 한다. 박정희가 받고 끊었는데 내용은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로 몰려와서 혁명파 장 교들을 체포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전화는 30 단에서 거사 비밀이 누설된 것을 처음으로 알린 김재춘의 전화가 아니고 그뒤에 진행상황을 누군가가 보고한 전화로 추정된다). 박정희 는 전화를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라고 한다.
이때 한웅진 육군 정보학교장과 장경순 육본 교육처장이 나타났 다. 원래 두 사람은 김포 입구에 먼저 가 있다가 박정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경순 준장은 한웅진 준장이 묵고 있던 청진동 미화호텔에 밤10시쯤 나타났었다. 한웅진은 방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한웅진을 만났다.
'아니, 한 장군. 이런 때 늑장을 부리면 어떻게 하오.' '박정희 장군이 연락을 했다는데 우리더러 집으로 오라고 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틀림없어. 육성을 내가 들었어요.'.
두 사람은 지프를 타고 신당동으로 달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박 정희는 키 큰 두 장군이 나타나자 '군화 신고 그냥 들어와요'라고 했 다. 박정희는 '다 탄로났어'라고 말했다. 장경순의 기억에 따르면 박 정희는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고 무표정한 편이었다고 했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일어서면서 '갑시다'라고 거의 동시에 말했다고 한다.박정희도 따라 일어서면서 '갑시다'했다. 모두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현관을 나서면서 아내에게'내 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보오'라고 했다.
김종필이 골목으로 나와보니 아까부터 있던 지프 두 대가 한쪽 켠 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종필은 방첩대에서 미행용 으로 배치한 지프라고 짐작했다. 김종필은 거사계획이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마당에 어차피 오늘 하룻밤만 넘기면 된다는 배짱으로 이 지프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두 대의 지프엔 조장 김응서가 지휘하는 7명의 506부대(서울지구 관할) 방첩대 요원 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물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밖에는 승용차가 두 대, 안에서는 수명이 음주중'이란 보고를 무 전으로 해놓고 대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이때 장도영이 '박정 희를 체포하라'는 한 마디 명령만 내렸더라면 이들은큰 저항없이 쿠 데타 지도자를 체포함으로써 거사를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기중이던 지프에 탔다. 뒷 자리에는 한웅진, 김종필이 올랐다. 장경순은 데리고 온 권천식 소령, 한웅진이 데리고 온 신동 관 소령과 함께 뒷차에 탔다. 이때 한웅진은 '아차, 내 권총'이라고 했다.권총을 미화호텔에 두고 온 것이다. 박정희가 탄 차는 청진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경순이 그 뒤를 따르는데 검은색 지프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