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있던 혁명파 장교들은 박정희 소장의 일거수일 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위기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지도자를 쳐다보고 그 지도자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한다. 이 석제 중령도 박정희를 관찰하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 총무처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뒤 지금은 천안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너무 긴장되니까 담배 피우던 사람들도 담배를 피우지 않더군요. 골초인 저도 그랬습니다. 출동부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우리는 박정희 장군의 결단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총장과 나누는 대화를 우리는 옆에서 다 들었습니다. 그 분은 소파에 앉아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그 때 이석제는 박원빈 작전참모 방에 들어갔다가 카빈총과 상자째 의 실탄을 발견했다. 실탄상자를 지프에 실어다 놓았다. 그는 권총을 두 자루나 품고 있는데도 카빈을 들었다. 이석제는 여차하면 한판 크게 벌이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박정희가 일어났다.결 심을 굳힌 듯 했다. 항공점퍼를 입고 있었던 박정희는 점퍼 안에 어깨 에 거는 권총집에다가 총신이 긴 리볼버를 차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재 춘 참모장에게 장도영 총장에게 전하라면서 편지를 한 통 건네주었다.
김재춘은 6관구 작전처 송정택 중위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 '지금 즉 시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하고 오라'고 명령했다. 송 중위는 신의주 동 중학교 출신으로서 장도영의 후배였다. 송 중위는 서울 시내로 들어가 지금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서울방첩대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서 울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을 통해서 이 편지를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했다. 장 총장은 편지를 읽고는 이 대령에게 건네주어 그 원문은 지금 김재춘 이 보관하고 있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런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 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 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 민족을 구하고 명 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 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일철하여 결사감행하게 된 것 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서 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탁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 로서 진두에서 지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 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 완수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서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불비재배 5월16일 소장 박정희.>.
이 편지를 읽어본 장도영은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 장군이 아직도 6관구에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전화를 바꿔라'고 지시했다고 한다.박 소장이 전화에 나오자 장도영은 언성을 높이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회고록).
'당신 편지 보았는데 그것은 범행이고 반동이오. 어서 정신차려 빨리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체포하겠소.'.
박정희는 '부대들이 거사하기 위해서 출동했으니 이젠 중단할 도리 가 없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장도영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부대들은 내가 일체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명해 놓았는데 무슨 출동 이란 말이오. 체포되지 않으려면 빨리 돌아가시오.'.
이런 대화가 사실이라면 장도영 총장은 '반란군'을 출동시키려 하고 있는 '수괴'에게 아직도 '자진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5·16혁명실기'엔 박정희가 이날 밤 두 통의 친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 적고있다. 원래 계획은 쿠데타군이 주요 목표지를 점령한 다음 장총 장에게 윤태일 송찬호 준장을 통해서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었는데 그 전에 탄로가 나는 바람에 없애버리고 다른 편지를 전달한 것이라고한다. 소각해버린 친서의 내용은 이러했다고 한다.
<총장 각하.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 를 명조를 기하여 기어이 단행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다만 처음계획 으로서는 각하를 직접 모시고 이 성스러운 거사를 단행하려 했으나 만 약 이거사가 실패했을 때의 전책임을 소관이 지고 각하에게는 폐가 돌 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만으로 거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러 나 각하께서는 이러하 우리들의 미충을 양해하시고 또한 우리들의 충성 된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이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 선두에 설 것 을 굳게 믿는 까닭에 감히 거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글을 각하께 서 받으실 때는 충용스런 각하들의 부하들은 서울에 진주를 끝마치고 중요한 목표를 점령하여 착착 진행시키는 시간일 것입니다. 속히 나오 셔서 우리를 지도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5월 15일 밤. 박정희 배.>.
'5·16혁명실기'는 이 편지는 이낙선 소령이 기안하고 박정희와 김종 필이 가필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 두 편지의 중대한 차이점은 전달된 편지엔 '각하의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한다'고 적혀 있고 소각해 버렸다는 편지엔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 운운'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석제는 '장 총장에게 전달된 편지의 의미는 '혁 명에 실패하면 우리는 죽지만 당신은 빠져나가시오'란 면죄부였다'고 주장했다.
김재춘은 새벽 2시 전 박정희 장군에게 '공수단으로 가셔서 부대를 직접 지휘해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5·16혁명실기'에 는 박정희가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수단행을 강행했다고 적혀 있다. 이석제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공수단과 해병대도 안심이 안 되는군. 내가 직접 가서 출동을 지켜봐야겠어'라고 말하며 6관구를 나 섰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공수단으로 떠나기 전 김재춘에게 '참모장은 계속 여기에 남아서 지휘해주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종필은 나중에 이날 밤 거사를 성공시킨 박정희의 3대 결심을 꼽은 적이 있었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을 알고도 신당동 집을 나와서 진압군측 헌병들이 기다리는 6관구로 향한 것, 혼란에 빠진 6관구에서 나와 실병력이있는 공수단과 해병대로 간 것, 그리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의 결단이 그 것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