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방송
박정희는 혁명공약 인쇄물을 들고 남산으로 달리는 차중에서 김종필 에게 처음으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한다.
'아니, 장 장군이 그럴 수 있어. 나한테 총을 쏘라고 시키다니. 우리가 그 동안 알려줄 것은 다 알려줬잖아.'.
남산 KBS방송국에 박정희가 도착했을 때 공수부대원들은 아나운서와 방송 기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당직 아나운서인 박종세는 1층 보 도계실로 피했다가 다시 텔레타이프실로 옮겨 웅크리고 있었다. 연초 에 이런 일을 예상하여 방송국 내부를 염탐해 둔 적이 있었던 김종필이 '박 아나운서 있소, 나오시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오'라고 외치면서 들어왔다.
김종필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니 별을 단 장성들이 여러 명 서 있었 다.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손을 내밀면서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 바쁜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박 종세에게 군사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한 뒤 혁명공약이 적힌 전단을 건네주었다. 박정희 일행은 박종세를 앞세워 2층 주방송실 로 올라갔다. 박종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저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거짓말 말어. 썩었구나 이 놈도. 너따윈 죽여버려야 돼.'.
한 공수단 장교가 철거덕 권총을 장전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웅진 (육군정보학교장) 준장이 '자넨 참아'라고 말리고는 '지금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더 있어야 한단 말이오'라고 했다. 방송기계를 다룰 줄 아는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공수단원들에게 이끌려 기술직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총소리가 나자 방송국 뒷담을 넘어 달 아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이윽고 주조정실에 빨간, 파란 불이 들 어오기 시작했다. 한웅진은 '형님, 직접 방송하십시오'라고 권했다. 한 웅진은 간밤 차중에서 '방송이라도 하고 죽읍시다'라고 농담을 했던 것 이 생각났다. 박정희는 예의 그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 다.행진곡이 울리고 박종세가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 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 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 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 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 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 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 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 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 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 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 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있습니다. 우리 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 다.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육군중장 장도영.>.
대한민국 성인남녀들이 달달 외우게 되는 이 혁명공약은 김종필이 초안을 잡고 박정희가 교열을 본 것이다. 이 문장엔 한 시대의 대명제, 또는 유행어가 될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구악, 기성정치인, 청신한 기풍,기아선상, 참신한 등등. 이 혁명공약문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관념적인 용어가 적은 대신에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표현들이 많다.
언어가 사상을 표현하고 사상이 시대를 만들어간다면 이 혁명공약문은 실사 구시, 즉 현실과 사실에서 논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행동윤리로 삼 고 있는 새로운 국가 지도층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이 방송문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꼿꼿이 서서 방송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박정희는 부하들이 '각하, 한번만 꼭 직접 방송을 하십 시오'라고 권해도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자는 이 때 부산에서 중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한다고 새벽에 일어났다가 이 방송을 들었다. '오늘 학교에 안가도 되 겠다'는 생각이 났다. 박정희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인 아버지의 첫 반 응은 윤보선 대통령의 그것과 똑 같았다.
'올 것이 왔어.'.
아버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는 아직 선의의 독재가 필요한 나라야.'.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고 있는 사이 장도영 총장은 비로소 병력동원 명령을 내린다. 소공동에 있던 서울방첩대 사무실에서 지휘를 하고 있 던 그는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한강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하고 있 다는 보고를 받자 수색 30사단 이상국 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밤의 반란기도를 제압한 이 준장의 목소리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고 있었 다. 장도영은 '지금 어느 정도의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는가'하고 물었 다.
'1개 중대 정도는 되겠습니다.'.
장도영은 다른 장교를 시키면 또 반란군으로 돌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사단장이 직접 지휘하여 서울로 들어와 시청을 경비하라고 지시 했다. 전군을 통틀어 제2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출동한 병력은 1개 중대가 유일했다. 이 중대도 시청에 도착했을 때는 혁명군에 접수되어 총구를 거꾸로 돌리게 된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