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과 중령의 담판
5·16 군사혁명 이후 최초의 의미 있는 한미간 대화는 5월19일 오전 에 미8군 사령관실에서 있었다. 5월16일자로 중령에 복귀한 김종필은 사복 차림으로 간다는 조건을 붙여 이 요담에 동의했다. 매그루더는 멜 로이 부사령관을 배석시켰다. 통역을 두고 진행된 이날의 요담은 군인 들의 대화답게 직설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의 기억에 따르면 매그루더와의 대화는 대강 이러했다고 한다.
매그루더는 손님을 앉혀 놓고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노기를 띠고 말했다.
매그루더: '귀하들은 우리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마이어 협정 (1950년7월에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긴 대전협정) 위반을 했다. 귀하는 지금 돌아가서 보스에게 전하라. 16일 이전 상태로 부대 를 돌리면 불문에 부치겠지만 불응하면 그대로 둘 수 없다.' 김종필: '사령관이 대전협정을 고집한다면 좋다, 우리 요구도 들어 주어야 한다. 혁명을 인정하라.'.
매그루더: '그것은 둘째 문제다. 귀하들은 나의 권한을 무시했고 작 전 지휘권을 문란케 했다.' 김종필: '그러니까 혁명 아닌가. 혁명할 때 미리 찾아가서 '지금부 터 부대를 출동시키겠습니다'하고 신고하고 하는 데도 있나.'.
매그루더: '마이어 협정을 위반하고 나의 군 지휘권을 침해한 사실 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쿠데타군은 즉시 원대복귀하라.' 김종필: '그러면 우리더러 혁명을 포기하란 말인가. 영원히 반란군 상태로 있으란 말인가.'.
매그루더: '여러 말 말고 원대복귀시켜!' 김종필(일어서면서): '이런 분위기에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회담 을 더 계속할 이유가 없다.'.
김종필이 방을 나가려고 하니까 멜로이 부사령관이 말렸다. 그는'미 스터 킴, 우리는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 않았소'라고 하더란 것이다. 김 종필은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그루더 사령관께서 저렇게 화가 나 계시니 내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일개 중령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에는 '80노인 도 열살짜리 손자한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말씀하시라고 해주시오.'.
매그루더는 김종필과 비로소 대좌했다. 그는 '왜 혁명이 필요했소' 라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대장과 중령 사이의 대화가 풀리기 시작했 다. 첫날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김 종필은 돌아와서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다음날인 5월20일 매그루더는 다시 김종필과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이날 회담에서 한미간의 타협 점이 모색되었다.
김종필은 혁명군을 원대복귀시키는 조건으로서 서울을 반 혁명세력으 로부터 방어할 수도방위사령부를 신설하고 이를 혁명위원회 직속으로 둘 것을 제안했다.
김정렬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의 주선에 의한 매그루 더-박정희 회담도 5월23일에 열렸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수영 외무차관을 통역으로 데리고 매그루더를 찾아가 세 시간 이상 회담했다고 한 다. 돌아온 박정희는 아주 밝은 표정이었고 '우리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길게 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5월25일 세번째 매그루더- 김종필 회담에서 한미간의 갈등을 마무리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합의 가 이루어졌다. 이날의 회담기록은 남아 있다. 매그루더 대장의 집무실 에서 있었던 이 요담엔 미군측에선 매그루더, 멜로이 부사령관, 미8군 정보참모 콘 대령, 통역관 한상국 중령, 레이놀즈 소령, 존 애치(통역 관),정보장교 몰 대위가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대화록이 중요한 것은 5·16 전후의 사정을 보여주는 당시의 유일한 공식기록이기 때문 이다. 그 뒤에 만들어진 기록이 미화, 왜곡, 축소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자료는 한미간의 공동기록에 의하여 보존되었기 때문 에 정확성이 보증되고 있다.이 회담에서 5·16혁명의 기획자 김종필 중 령이 길게 설명하는 혁명의 과정과 동기도 그런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 이다.
김종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진정한 목적을 매그루더 장군에게 충 분히 설명드리지 못하여 오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현직에서 강제 전 역당할 때도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거사계획이 탄로 날 것이란 판단에 도달하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벌인 정군운동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귀하는 한국군의 고급장성들과 매우 친밀하였습니다만 이들은 하급장교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하여서 는 무관심한 분들이었습니다.
둘째, 4월혁명 이후 육군에서는 군부를 숙정해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이 공산화와 쿠데타를 막 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군 내부에는 상호 반목하는 많 은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하급장교들은 고급장성들의 부패상을 도 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컨대 어느 중장은 2백80만환을 축재했 고 부하장교의 부인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 리 하급장교들이 상관들을 존경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1960년 3월15일 선거에서 고급장교들은 부정선거를 위해서 2억환의 자금을 받아 선거에 쓰지도 않고 착복했습니다. 우리 군은 표면적으로는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 이면은 부패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북한군 하급장교들 은 사병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정신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급장교들의 이런 솔선수범은 하사 관들의 생활태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무리 장비가 좋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단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군대는 싸울 수가 없 습니다.
우리는 고급장성들의 집과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였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불평분자로 몰았습니다. 매그루더 사령 관이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 오해를 갖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박 정희 장군을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으니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급장교들이 박정희 소장을 좋아한 이유는 그의 정직, 청렴성, 그리고 이해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혁명에는 2백50명의 장교와 3천5백명의 사병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의 일념은 나라를 구하고 부패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부정축재를 하면서 기울어 져 가는 나라를 방관해온 정치인들입니다. 우리는 혁명 이후 정부를 민 간인들에게 이양할 것이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 리의 계획과 목적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믿 습니다. 우리와 매그루더 사령관 사이에는 깊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자 합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