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군인 장관들
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사무실을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민의원) 건물로 옮겼다. 최고회 의 의장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의장은 박정 희소장. 이날 오전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한다. 그는 최고 회의측에 이 결심을 통보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날이 저물도록 아무도 청와대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날 밤 8시 윤 대통령은 하야 성명서를 등사하여 언론사에 돌림으로써 성명서를 대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금번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희 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 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 람들이 맡아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 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 사람들은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국민 여러분도 적극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장도영은 이 하야성명이 방송으로 보도된 이후에야 이 중대사실을 알았다. 5·16 이후 장교들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긴 장된 가운데 정신없이 이리 저리로 쫓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대 통령의 하야하겠다는 연락도 이런 가운데 장도영에게 닿지 않고 실종되어버릴 정도였다. 장도영은 하야 성명을 알게 되자 청와대 로 올라가려고 맞은 편 박정희 방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대통령이 사임하면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니 지금 청와대로 같이 올라가서 만류합시다.' '그만둔다면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도영은 어이가 없어 말없이 박정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만 둔다는 것을 저희들이 어떻게 합니까.'.
장도영은 언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여보, 당신 지금 혁명을 바로 하려는 것이오? 이 시기에 계 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없어지면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 이오?' '지금 대통령이 있으나 없으나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 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이 말을 할 때 표정은 '냉소적'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소. 빨리 나하고 올라갑시다.'.
박정희는 말없이 장도영을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이왕 혁명을 하는 마당인데 실권 없는 대통령을 장식물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장도영은 사태 수습에 대통령의 권위를 빌리려 했으니 두사람의 혁명관은 하늘과 땅 사이만큼 컸다.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은 윤 대통령에게 번의를 간청했다.
'각하께서 떠나시면 당장 대외관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혁 명이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유일한 헌법기관 인 대통령께서 물러나시면 수교국과는 물론이고 유엔과의 관계에 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외교관들의 견해입니다.'.
장도영은 밤늦도록 설득을 계속했다. 그러는 사이 박정희는 혼자서 돌아가고 말았다. 장도영의 그런 설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윤보선은 장도영에게 물었다.
'민정이양은 언제 할 거요.' '아직 완전한 합의는 못보았지만 석달 내지 반년정도 잡고 있 습니다. 각하께서 마음에 드시지 않더라도 민정이양 때까지는 대 통령으로 계시면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윤보선은 장도영의 성의 있는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 이 물러나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사람은 장도영인데 그가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야를 만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했 다. 다음날 오후 2시쯤에는 김용식 외무차관이 대통령을 찾아와 서 국제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하야를 말렸다.
'각하께서 사임하시고 난 후 당장 북괴군이 남침해와도 우리 는 속수무책입니다. 국가로 승인을 못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유엔 이나 자유우방 국가에 호소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김용식은 대통령이 하야하면 우리 정부가 54개국과 수립해놓 은 국교가 무효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윤보선은 이날 오 후 장도영과 박정희가 배석한 가운데 하야를 번복하는 기자회견 을 했다. 이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수반 겸 국방부 장관은 장도영(39), 외무부 장관은 김홍 일(57) 예비역 육군중장, 내무장관 한신 육군소장(국방연구원·40), 재무장관 백선진 육군소장(육본 군수참모부장·40), 법무장관 고 원증 육군준장(41·국방부 법제위원장), 문교부 장관 문희석 해 병대령(해병대 작전교육국장·40), 부흥부를 대체한 건설부장관 박기석 육군대령(2군 공병부장·34), 농림부 장관 장경순 육군준 장(육본 교육처장·40), 상공부 장관 정래혁 육군소장(국방연구 원·38), 보사부 장관 장덕승 공군준장(공군의무감·44), 교통부 장관 김광옥 해군대령(해군대학총장·36), 체신부 장관 배덕진 육군준장(1군 통신부장·38), 국무원 사무처장 김병삼 육군준장 (육본 일반참모비서실장·40) , 공보부장 심흥선 육군소장(육본 인사참모부 차장·36).
이들 14명중 50대는 한사람뿐이었다. 40대가 7명, 30대가 6명 이었다. 장면 내각 장관들보다도 20세 가량이 젊어진 것이다. 거 의 한세대의 연령차였다. 이 세대교체는 5·16쿠데타가 혁명으로 진행하기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목표달성과 효율성, 그 리고 책임감과 추진력으로 무장한 30, 40대가 60대의 민간정치인 들을 대체하고 국가지도부를 차지한 것이다. 젊어진 국가지도부는 그 젊음 그대로 전광석화같은 개혁 조치들을 연일 터트리기 시작한다.
패기만만한 장교단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면적인 접수 와 개조작업이 발진한 것이다. 중앙정부 부처, 국영기업체, 경찰, 지방행정기관의 장과 간부로 나간 장교들은 현대적 조직경영을 경험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선진된 세력이었다. 당시 한국군 장교단 약 6만명 가운데 약 10%가 도미 유학경험을 가지고 있었 다. 이 비율은 당시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