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5월25일쯤 중앙정보부 조직안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서정순 중령이 김종필에게 건의했다.
'정보전문가들이 만든 안인데 아무래도 법률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 할 것같아.'.
김종필은 '하극상 사건 때 나를 도와준 분이 계셔. 최 동지가 모셔 와.'.
최영택은 서대문 근처에 있던 신직수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중앙여 관으로 모시고 왔다. 신직수는 군 법무관 시절에는 박정희 사단장 아 래서 법무 참모로 일한 적이 있었다. 신직수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법 의 법률적인 검토를 해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일별하더니 말했다.
'잘 하셨는데 이대로는 부족합니다. 손을 많이 대야겠습니다.'.
신직수 변호사는 김종필로부터 중앙정보부법 초안을 넘겨받아 집으 로 가져갔다. 다음날 그는 말끔하게 고친 법률안을 들고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직수는 중정 법률고문으로 임명되고 1970년대 엔정보부 장이된다. 정보부 요원들은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등 수사기관에서 뽑아왔다. 최영택 중령은 육본정보국 차장 최택원 준장과 첩보부대장을 찾아가 정보요원들을 뽑아왔다. 방첩대에서 오래 근무했 던 이영근, 서정순은 방첩부대에서 수사요원들을 많이 데려왔다. 김종 필은 5월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정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에게 가져갔다.
박정희는 내용을 일별한 뒤 만족해 하면서 '두고가면 의장 결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김종필이 다시 찾아갔더니 박정희는 '장도영 장군이 결재를 보류시켰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은 이때 육사8기 동기생인 김종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하고 나가더란 것이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장도영이가 정보부에 자기 사람들을 심으려는 것 같아 우리끼리 해치워야겠어.'.
그때 김종필은, 장도영 의장이 동향인 인천지구 첩보대장 출신인 김 일환 예비역 대령을 정보부장으로 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며칠 뒤, 즉 5월말 김종필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장도영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빨리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재촉했고, 자신이 직 접 장 의장을 찾아가 설명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받아온 결재 서류를 들고온 김종필은 최영택 등 창설요원들과 앉아 주요 인사를 결정했다.
부장 자리엔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행정관리 차장에 이영근, 기획운 영 차장에 서정순, 총무 국장에 강창진, 해외담당 제2국장에 석정선,수 사담당 제3국장에 고제훈, 교육 담당 제5국장에 최영택, 통신실장에 김 태진, 비서실장에 김봉성, 고문에 신직수(법률담당)-장태화(정치담당)- 김용태(경제담당). 완전히 김종필 인맥으로 구성된 중앙정보부는 군정 기간에 박정희 의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를 받으면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 군정 이후를 내다본 새로운 정부와 정당을 연구하고 조직하는 산파가 된다.
6월10일에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은 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 이었으나 엄청난 권한을 담고 있었다.
정보부의 기능은 '국가 안전보장과 관계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 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활동을 조정 감독한다.' 부장과 차장은 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어 의장이 임명한다. 전국에 지부 를 두며 직원은부장이 임명한다. 정보부는 소관 업무에 관한 수사를 할 때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의 직원 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국가기관으로부터 받 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법안이 공포되기 전에 중앙정보부는 이미 기능을 시작한 상태였다.
최영택의 기억으로는 정보부에 최초로 보고해온 곳은 치안국이었다 고 한다. 치안국장은 육군헌병감으로서 정군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석 정선을 강제예편시킨 조흥만 준장이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흥만이는 자네 옷을 벗긴 사람이잖아. 왜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어?' '이봐, 과도기에는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성이 더 중요해.이 런 사람이 충성은 더 잘하지.'.
치안국이 올린 보고의 요지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온 여객기에 불법으로 입국한 재일동포 전세호란 자가 경 찰에 검거됨. 이 자는 박정희 장군이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 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음. 거류민단에서 학생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해 왔 는데 박 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서 귀국을 강행했다고 함.>.
해외담당 국장이 된 최영택은 사보이 호텔에 붙들려 있는 전세호를 만나러 갔다. 전세호는 민단과 조총련에 대해서 깊은 정보를 말하는 과 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유태하 전 주일대사를 꼭 데리고 오십시오. 일본에서도 귀국을 거 부하고 있는 그분의 존재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자금을 써가면서 그 동안 정계, 재계, 야쿠자 조직에까지 아주 넓 은 인맥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분을 데리고 와서 이 인맥을 활용할수 있다면 한일회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날 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물어 전세호가 제자임을 확인했다. 유 태하전 대사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에 귀국을 거부하고 있었고 혁 명정부도 그를 부정축재자로 지목하여 수배해놓고 있었다. 다음 날 정 보부에선 '유태하 대사 귀국공작' 회의가 열렸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혁명구상단계 때부터 혁명 이후엔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예상하 고 이때 일본으로부터 돈을 꾸어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종필 부장은 최영택에게 '전세호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유태하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때 한일 두 나라 사이엔 국교가 없어 일본 에 입국하는 데 편법을 써야 했다. 최영택은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홍콩 비자를 얻었다. 홍콩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이틀간 체류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홍콩에 들어간 뒤 홍콩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입국 비자를 얻었다. 전세호의 협조를 얻어 최영택은 한 20일 뒤 유태하 대사를 데 리고 귀국할 수 있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